승리의 토요일, 그리고 패배의 토요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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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히 다른 토요일이네요"

강남경찰서 역삼지구대 소속 한 경찰관의 이야기다. 지난 12일 토요일 밤 12시경 그리스와의 경기에서 한국이 2:0으로 이기던 날, 역삼지구대는 강남역 앞 도로에서 400-500명의 시민들이 도로를 점거하고 있다는 신고를 받았다. 그러나 출동한 경찰들은 이내 난감한 상황에 빠졌다. 경찰들은 "흥분한 시민들이 경찰차 위로 올라와 '대한민국'을 외치며 난동을 피웠다. 게다가 차 지붕의 경광등까지 돌리고 있더라. 경찰차의 진입이 허용되지 않아 결국 10여분 동안 군중에 갇혀있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경찰의 말에 따르면 한국이 경기에서 이기면 흥분한 시민들이 버스 위, 정류소 비막이 위까지 올라가 '대한민국'을 외친다고 한다. 결국 그 분위기에 휩쓸린 한 외국인은 '대한민국'을 외치며 자동차를 손괴시켜 경찰서에 입건됐다.

2주가 지난 후, 같은 토요일이었지만 역삼지구대는 다른 토요일을 맞았다.
26일 토요일 우루과이와의 16강전 후, 27일 새벽 4시경 역삼지구대는 단순 폭행사건을 처리하고 있었다. 술집에서 우루과이에 패한 한국 선수들을 욕하던 한 남자가 이에 시끄럽다고 불평하는 다른 손님을 술김에 폭행한 사건이었다.

이 날 새벽 4시 7분까지 역삼지구대에는 30여 건의 신고가 들어왔지만 월드컵과 관련된 특별한 사건은 없었다. 단지 거리는 패배의 아쉬움으로 가득 찬 모습 뿐이었다. 새벽 3시 30분경 강남역 인근의 번화가에서 트럼펫을 불고 생수통을 두드리며 '대한민국'을 외치던 6명의 붉은 악마들은 머쓱함을 감추지 못했다. 단 몇 시간 사이에 같이 호응해주던 시민들이 없어져 버린 것이다. 유윤필(27세)씨는 "그리스전이나 16강 진출이 확정됐던 나이지리아전 때에는 생수통만 두드려도 사람들에게 금세 둘러싸여 '대한민국'을 같이 외쳤다"며, "경기에 지고 8강 진출이 좌절되자 사람들의 열기가 순식간에 식었다"고 아쉬워했다.

이처럼 경기의 승패에 따라 각기 다른 토요일을 맞았던 역삼지구대.
한 경찰은 "아침에 출근하며 한국이 이긴다면 어느 정도의 사건이 벌어질까 생각을 하고 왔다. 비록 경기에는 졌지만 큰 사고가 나지 않아 다행이다" 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멀티미디어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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