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쌈짓돈 모아 "역사왜곡 반대" 신문광고 시민·종교단체 '反우경화' 목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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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틀린 글자가 없는지 다시 확인하는 게 좋겠어요."

1일 오전 11시쯤 일본 도쿄(東京) 신주쿠(新宿)구 와세다(早稻田)대학 부근에 있는 일본기독교협의회(NCC)사무실. 니시하라 미카코(西原美香子) NCC 간사 등 두 여성이 탁자 위에 놓인 A3크기 종이 4장을 꼼꼼히 살펴보고 있었다.

종이 한 장에는 '사랑과 평화' '전쟁준비를 중단하라' '일본은 다시 전쟁 속으로 들어가고 있는가?'라는 문구가 일본어와 영어로 적혀 있었다. 다른 종이에는 깨알같은 글씨로 수많은 사람들의 이름이 실려 있었다. 니시하라 간사는 "2일자 아사히 신문에 실릴 유사(有事)법제 반대 전면광고 문안을 점검 중"이라며 "이름은 모금에 응한 사람들"이라고 설명했다.

유사법제는 일본이 무력침략을 받는 등 유사시에 자위대와 주한미군이 즉각 군사적 대응을 할 수 있게끔 법규들을 정비하는 것을 말한다. 많은 시민·종교단체들은 "유사법제는 전쟁금지를 명시한 평화헌법에 위배된다"며 반대하고 있다.

이번 신문광고는 일본기독교협의회를 주축으로 1백여 시민·종교단체가 계획, 지난 3월 20일부터 시민 한명당 2천엔(약2만원)씩 모금하는 운동을 펼친 결과 탄생했다. 지금까지 3천5백여명이 총9백만엔을 냈다. 니시하라는 "유사법제의 위험성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아 의미를 널리 알리기 위한 것"이라고 취지를 설명했다.

일본 시민·종교단체들은 역사왜곡 교과서, 총리의 야스쿠니(靖國)신사 참배, 헌법개정 논의 등 '우경화'문제가 터질 때마다 반대집회·강연회를 열거나 서명운동 등을 활발히 펼쳐왔다. 일본기독교협의회는 3천5백명으로부터 유사법제 반대 서명을 받아 국회에 전달하기도 했다.

일본 '헌법의 날'인 3일에는 많은 시민단체들의 '유사법제 반대 및 헌법수호 집회'가 예정돼 있다. 전국 시민단체들이 결성한 '유사법제 반대 전국공동행동실행위원회'는 4일 도쿄에서 토론회를 개최한다.

특이한 것은 지난해부터 신문광고로 호소하는 시민단체가 늘고 있다는 점이다. 35개 여성단체가 지난해 설립한 '여성의,헌법의 해 연락회'는 3일자 아사히 신문에 '유사법제 반대 및 헌법수호'를 주장하는 전면광고를 낸다.광고를 주관한 호리에 유리(堀江ゆり) 부인단체연합회 사무국장은 "여성단체들이 나서서 헌법을 지키자는 취지에서 모임을 만들었다"며 "35개 단체의 회원들이 1백~2천엔씩 쌈짓돈을 털어 1천7백만엔을 모았다"고 밝혔다. 지난해에는 역사왜곡 교과서 파동 때 반대운동을 펼쳤던 시민단체 '어린이와 교과서 전국네트 21'이 아사히 등 3개 신문에 '역사왜곡 교과서 반대'광고를 내기도 했다.

신문광고는 전면일 경우 1천만엔(약1억원) 이상일 정도로 비싼 대신 호소력이 매우 강하다. 이 때문에 일본 시민단체들은 상황이 심각하다고 판단되면 최종수단으로 '모금에 의한 신문광고'를 활용한다. 시민·종교단체들이 광고까지 내며 유사법제 반대에 나선 것은 "일본의 과거 잘못을 되풀이해선 안된다"는 자기반성 때문이기도 하다.

도쿄=오대영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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