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 낀 날이 싫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며칠 전 한 대기업 사장이 전화를 걸어왔다.

"정치가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모르겠다"면서 "몇몇 기업인들의 모임이 있는데 그 자리에 초대하고 싶으니 정치부 기자를 소개해줄 수 없겠느냐"는 것이었다. 요즘엔 경제계 인사들을 만나도 화제는 단연 정치다.

기업인이 답답해하는 이유

'게이트들이 하도 많고 복잡해서 이해하기가 어렵다'는 이야기부터 시작해 끝은 으레 '누가 대통령이 될까'다. 이들이 정치에 관심을 갖는 것은 심심풀이로서가 아니라, 비즈니스와 직결되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차기 정권의 스타일이 기업 활동을 풀어주는 쪽일지, 규제를 강화하는 쪽일지에 따라 기업의 전략도 크게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대선 결과는 고사하고 그 전의 정국 전개도 오리무중(五里霧中)이니 답답하다는 기업인들이 많다. 기업인들이 가장 싫어하는 날씨는 '맑은 날'도, '비오는 날'도 아닌 '안개낀 날'이라고 한다.

호황이 예상되면 물론 좋고, 불황도 확실하게 보이기만 하면 미리 감량 경영을 하는 등 어느 정도 대비할 수 있지만 이도 저도 예측이 안되는 것은 정말 최악이라는 것이다.

현재 우리 경제를 보면 경기가 좋아지고 있고, 금리가 싼 데도 투자는 여전히 부진하다. 투자를 하지 않으면 미래도 없다는 점에서 심각한 일이다. 기업들이 투자를 꺼리는 것은 무엇보다 '불확실성'때문이다. 올해 투자를 시작하면 공장을 짓고 제품이 나오는 데까진 적어도 1~2년이 걸리는데 그 때 세상이 어떻게 변할지 알 수가 없어 몸을 사릴 수밖에 없다는 분위기다.

사정이 이런데도 경제가 정치에 휘둘리는 모습이 올해에도 되풀이될 조짐이 여기저기서 보인다.

우선 경기 대책만 해도 그렇다. 뜀박질하는 부동산값·물가를 잡으려면 금리를 올리고, 나라 돈이 너무 많이 풀리지 않도록 하는 등 경기조절책을 펴야 한다는 지적이 많았으나 정부는 계속 미뤄왔다. '수출·투자가 본격 회복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나 정부가 선거를 앞두고 인기없는 정책을 펴기 꺼려한다는 의심도 받고 있다.

진념(陳稔)전 경제 부총리의 사퇴도 아쉬움이 남는다. 그는 경기도지사 출마를 위해 사표 내기 얼마 전 미국의 무디스사를 방문,한국의 신용등급을 한꺼번에 두단계나 올리는 쾌거를 이끌어냈다. 그는 그때 "올해 선거가 있지만 경제가 정치에 발목잡히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강조했다고 한다.

그런데 경제 정책을 '정치 중립적'으로 펴는 것은 둘째치고, 본인이 아예 정치권에 징발당했으니 이를 미국 사람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의문이다. 월드컵 대회 준비를 총괄하는 청와대 정책기획수석실은 요즘 여러 행사를 기획하며 난감해하고 있다. 지방선거와 일정이 겹치는 바람에 사전선거운동 문제가 걸려 시·도지사나 시장·군수들이 행사에 참석할 수 없게 됐기 때문이다.

정치가 경제에 부담 안줘야

이에 따라 지방선거 날짜를 조정하는 문제를 정치권과 협의했었으나 여야간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결국 바꾸지 못했다는 후문이다. 양대 선거가 있는 올해를 '잃어버린 한 해'로 만들지 않으려면 정치가 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최소화해야 한다.

이를 위해선 대통령이 중심을 잘 잡아줘야 한다고 본다.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은 요즘 외부 행사를 확 줄이고, 경제부처들의 업무 보고도 시간을 줄여서 받고 있다고 한다. 몸이 아팠던 데다 세 아들 문제로 마음도 편치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럴 때일수록 '국정, 특히 경제를 중시하겠다'는 초심(初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선거의 해'를 맞아 '정치에 휘둘리지 않는 경제'를 소망한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