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처럼 만들어 문외한도 이해 현대무용 확 변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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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7면

본격적으로 무용을 보기 시작한 10여년 전 기자는 '무용은 몸의 예술'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연극이 언어의 예술이라면, 무용은 신체의 움직임이 그 언어를 대신한다고 보는 단순논리였다.

당시 우리 무용(특히 현대무용)의 수준도 대개 그 정도가 아니었나 한다. 특정 학교의 학맥·인맥이 무용계를 좌우하는 상황에서 무용가의 창의성이 활발히 개진될 수 없었다.

젊은 무용가 대부분은 안무가(교수)의 '통제'하에 학교에서 배운 테크닉(움직임)을 그저 맹목적으로 표현하는 게 고작이었다. 그런 공연일수록 어려워서 도대체 무슨 이야기인지 해독이 안되었다. 아무튼 그게 좋은 무용이려니 했다.

그러나 그게 무용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계기가 찾아왔다. 1995년 베를린 하벨 테아터에서 본 지리 킬리언(네덜란드 댄스 시어터 전 예술감독)의 무용이었다. 그 공연은 무용이야말로 '몸의 움직임' 그 너머에 있는 '머리의 예술'임을 웅변했다.

그것은 거대한 드라마요 철학이었다. 문외한이 봐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만큼 몸짓의 구체성이 탁월했다. 보는 이에 따라 다른 무늬로 해독될 수 있는 몸언어의 다의성(多義性)도 뛰어났다. 비록 킬리언이 유럽 무용의 전체는 아니었으나, 불행하게도 '그의 것'을 통해 우리 무용의 누추함을 깨달을 수 있었다.

천만다행으로 그 뒤 우리 현대무용도 많이 변했다. 킬리언 등의 유럽무용이 활발히 수입·소개되자 현장이 자극을 받았다. '더 이상 테크닉 위주의 옛날 식으로는 안된다'는 위기의식이 발동하면서 표현양식에도 많은 변화가 왔다.

무용에 서사(드라마)가 개입했고, 다른 장르 혹은 영상 등과의 격의 없는 만남도 빈번해졌다. 상징적인 신체의 움직임을 실감나게 설명하려는 여러 유형의 지적인 실험이 활발하다는 뜻이다. 그래서 "이제는 좀 알 것 같다"는 무용팬들이 늘어난다. 최근 선보인 탐무용단의 '비탄''조소' 공연을 괜찮은 예로 꼽을 수 있다.

마침 봄 무대에 무용 공연이 제법 활발한데,예전과 비교할 수 없는 다양한 접근방식은 몸에서 머리로 가는 현대무용의 오늘을 보여준다. 경기도 남양주 두물워크숍(031-592-3336)에서는 연주회용 음악을 춤꾼의 머리와 몸으로 풀어보는 '20세기 음악과 춤 페스티벌', 즉흥성을 실험하는 '제2회 임프로비제이션 댄스 페스티벌'(02-3674-2210),'인어공주' 등 동화 주제의 모던발레 공연(02-766-5210)이 그런 경우다.

유럽의 아방가르드 특집으로 꾸민 국제현대무용제(Modafe2002·02-738-3931)와 견주어 보면 현대무용의 환골탈태를 더욱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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