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화로·겨울 부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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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여름 화로와 겨울 부채'를 이르는 하로동선(夏爐冬扇)처럼 다의적으로 쓰이는 말도 드물다. 후한(後漢)의 자유주의 사상가 왕충(王充)은 "여름 화로라도 젖은 것을 말릴 수 있고 겨울 부채도 불을 지필 수 있으니, 무릇 무용지물은 없다"는 긍정적인 뜻으로 이 말을 사용했다.

그러나 오늘날 이 말은 시의에 뒤떨어지거나 격에 어울리지 않는 사물에 대한 비유로 통용된다. 그런가 하면 당장 요긴하진 않으나 유비무환(有備無患) 또는 백년대계를 꾀하는 준비와 동의어로 간주되기도 한다. 필자가 가장 선호하는 해석이다. 현대적 관리기법인 '적기 조달(just-in-time)'과는 달리 한발 뒤처진 것처럼 비치는 행보가 오히려 한 걸음 앞서가는 셈이라고 할까.

얼마전 모 그룹의 회장은 계열사들이 사상 최대의 경영실적을 올리자 "자만하면 위기에 빠질 수 있다"고 경고하고 "5~10년 뒤에 무엇을 할 것인지 대비하라"며 되레 강도 높은 개혁과 전향적인 투자를 주문했다고 한다.'여름 화로와 겨울 부채'의 예지를 엿볼 수 있는 사례다.

유감스럽게도 우리 국민은 여름에는 부채만 찾고 겨울에는 화로에 몰리는 성향이 강하다. 목전의 이익에 안달하며 시류에 영합하다 보니 영어 발음 때문에 어린애의 혀 밑 인대를 자르는 일까지 서슴지 않는다. 자동차와 냉장고 등 내구성 소비재의 교체 주기도 세계에서 가장 짧다고 한다. 대역전극을 허용한 어느 대권후보만 하더라도 5년 전의 경선 불복이 결과적으로 단견이었음이 드러나지 않았는가. 대다수 국민이 거부감을 느끼는 특정 인사가 줄기차게 중용되는 것 역시 당장 몸에 편한 '여름 부채'를 찾은 결과가 아닌지 답답하다.

일각에서 간헐적으로 제기하는 '두뇌한국(BK)21 사업'에 대한 비판도 가시적인 성과를 채근하는 우리 국민의 '짧은 호흡'과 무관하지 않다. 물론 BK21 사업에서 드러난 일부 시행착오는 바로잡아야 한다. 그러나 BK21을 비롯한 연구개발에 대한 정부의 투자는 더 확대돼야 한다. 지식기반사회에서는 국부가 지식과 기술의 생성·축적·확산에 좌우되기 때문이다.

연구개발투자는 시장과 정부로부터 모두 홀대되기 쉽다. 첫째, 연구개발은 긍정적인 '외부효과'를 창출하므로 합리적인 경제주체는 다른 사람에게 무임승차하려는 유인을 지닌다. 따라서 연구개발을 시장에 일임하면 사회적으로 필요한 지식과 기술을 확보할 수 없다. 둘째, 연구개발투자는 회수기간이 길어 시야가 임기에 한정된 정치가에게는 당장 성과가 나타나는 사업이나 복지지출보다 매력을 끌지 못한다. 셋째, 연구개발의 성과는 측정하기 곤란하므로 정부는 가시적인 성과가 드러나는 사회간접자본시설 등에 대한 투자를 선호하게 된다.

이러한 특성에서 파생된 연구개발 기피 현상은 불행하게도 우리나라에서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꾸준히 늘고는 있지만 국내총생산 대비 연구개발비 비율은 아직도 일본과 미국에 뒤진다. 그나마 정부는 총연구개발비의 25%만 투자하고 있어 우리보다 정부 역할이 더 작은 선진국에 크게 못 미친다. 설상가상으로 연구인력의 4분의3 이상이 대학에 포진해 있고 국제학술지(SCI)논문의 80% 이상을 대학이 생산하고 있는데도 정부의 연구개발비 중 대학에 대한 지원은 22%에 불과하다. 선진국에 비해 매우 낮은 수준이다.

이처럼 대학에 대한 연구개발투자를 냉대한 결과 대학의 연구력은 취약하게 됐고, 이는 학문후속세대 양성의 해외 의존도를 높여 우리나라를 만성적인 지식수입 국가에 머무르게 하는 악순환을 유발하고 있다. 대학의 연구개발에 대한 정부의 소극적인 투자가 과학기술 개발과 국가경쟁력을 저해하는 출발점인 셈이다.

그나마 최근 우리 대학의 SCI 논문 생산량이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급증하고 있는 이면에는 유망·선도분야를 선택해 집중적으로 투자한 BK21사업이 큰 몫을 했다. 종전처럼 역량이나 성과와 무관하게 '1/n의 방식'으로 연구비를 안배하면 하향 평준화를 초래할 뿐이다. 당장 불요불급한 것처럼 보이는 '여름 화로와 겨울 부채'의 준비에 인색해 소탐대실(小貪大失)해서는 안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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