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信의 정치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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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인류 역사상 20세기만큼 이념대립이 치열했던 시기는 없었다. 역사가들이 20세기를 '극단의 시대'로 규정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이런 시대를 거치면서 이데올로기란 용어만큼 비극적 운명을 겪은 것도 없을 것이다. 이 시기에 이데올로기는 프랑스 보수주의 사상가의 대부인 레몽 아롱의 표현처럼 '적(敵)의 생각'이었다. 우익은 마르크스주의를 포괄한 전체주의를, 좌익은 파시즘을 포함한 부르주아 사상을 비판하기 위해 이 말을 사용했다.

이 용어의 비극은 이 말을 처음 만들어낸 프랑스 철학자 데스튀 드 트라시도 예상치 못했을 것이다. 그는 1795년 프랑스 학사원에 제출한 논문에서 형이상학과 심리학에 대비되는 실증적 정신과학의 동의어로 이데올로기란 용어를 사용했다. 여기에 처음으로 경멸적 의미를 부여한 것은 나폴레옹이었다. 그는 구체적인 문제에 관해선 잘 알지도 못하면서 추상적이고 이상주의적인 논리를 내세우는 교조주의자들을 '이데올로그'라고 부르며 경멸했다. 하지만 이런 그도 이것이 20세기의 엄청난 갈등의 진원이 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지금 이 땅에서 철지난 이념논쟁이 뜨겁다. 지역주의적 후진적 정치를 넘어 정책정당으로 나아가기 위해 이념논쟁이 필요하다는 지극히 건전한 이유에 수긍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색깔논쟁이 아니라 정책논쟁이 되어야 한다는 당위도 부정할 수 없다. 그럼에도 이념논쟁을 통해 상대편에게 '적의 생각'으로급정하려는 의도 또한 명백하게 읽혀진다.

사실 이념논쟁의 핵심에는 '노풍(風)'이 자리잡고 있음을 숨길 수 없다. 젊은 고학력·고소득층이 '노풍'이라는 코드로 사회변화 요구를 표출하고 있다는 것도 이미 여러 조사에서 드러났다. 그리고 지금의 이념논쟁엔 전략적 지역주의와 세대균열이 복합적으로 얽혀있다는 것도 확인된 사실이다.

문제는 김병국교수(고려대·정치학)의 표현대로'불신의 정치학'이다. '노풍'의 바탕에는 기존 권위에 대한 불신과 해체가 깔려있다는 것이다. 이념이나 '위험한 언론관'에 대한 비판이 젊은 세대를 설득하지 못하는 것은 이같은 불신 때문이라며 기존 공론(公論)의 권위가 심각한 위기에 처했음을 지적하기도 했다.

대신 인터넷은 이들에게 독자적인 의사소통의 수단을 마련해 주었다. 이들은 이제 자신의 문화코드를 통해 자신의 여론을 형성할 수 있는 기반을 갖추게 되었고, 과거처럼 기존 권위에 흔들리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오히려 그것과 경쟁하고 도발함으로써 더 많은 지지층을 확보하려 하고 있다. 결국 앞으로 서로 다른 문화코드 때문에 서로를 이해하고 설득하는 것 조차 불가능해질지 모른다.

과거와 같은 색깔론이 먹혀들지 않는 상황을 들어 이를 오히려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도 있다. 또 기존 공론의 편파성을 지적하며 언제 우리 사회에 공론이 제대로 형성된 적이 있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을 설득할 수 있는 공론의 장(場)을 포기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수많은 갈등이 잠재해 있는 우리 사회가 건강하게 발전하기 위해서라도 이들의 정치적 의사와 무관하게 이들이 우리 사회에 어떤 문제를 제기하는지 귀기울일 필요가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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