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16>우리서로 섬기며살자 ⑮ 노태우씨의 스타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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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노태우씨가 대통령으로 재임하던 시절(1988년 2월~ 93년 2월)나는 가끔 청와대로 초청받아 가서 그와 환담을 나누었다. 그는 사람의 말을 귀담아 듣는 스타일이어서 세간의 여론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따로 들려줄 말이 별로 없었다. 사람들이 자신을 '물대통령''물태우'라고 말하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1995년 11월부터 2년1개월간 노씨가 안양교도소에 수감되었을 때 13번 면회를 갔다. 그곳에서 노씨는 신·구약 성경을 통독하면서 차분히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내가 면회를 가면 성경을 읽다가 의문나는 점을 물었다. 이런 질문들이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안 지었더라면 인류는 어떻게 되었을까요?""죽으면 다시 살아나는 건가요?""회생이라는 것이 있습니까?"

그러면 나는 "그건 한 학기를 설명해도 시간이 모자라니 조용기 목사님이 오면 그때 물어 보세요"라고 말한 뒤 다음 면회 때 조용기 목사와 함께 갔다. 조목사는 30분 동안 빠른 어조로 조리있게 설교를 했다.

안양교도소 교도관 가운데 교회 장로가 한 사람 있었는데 면회를 가면 나를 안내하면서 노씨를 전도하려고 애썼다. 그 분은 수감 중인 사람들을 열정적으로 전도한 사람이다. 그는 잠깐의 틈도 놓치지 않았다. 그 분이 어떻게든 노씨를 전도하려고 애쓰면 노씨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신학대학도 안 나와놓고 뭘 설명하려고 합니까?"

그 말에 우리는 웃음을 터뜨리곤 했다.

노씨는 교도소에 있으면서 대통령 재임 시에 교도소를 방문하지 않은 것을 굉장히 후회한다면서 그곳에서 나가면 재소자들을 위해 좋은 일을 해야겠다고 말했다.

노씨가 구속된 후 적적해하는 부인 김옥숙씨를 위로하기 위해 아내와 함께 노씨의 집을 방문하기도 했다. 기도를 해주고 여러 사람들이 걱정하고 있다고 격려를 해주었다.

97년 노씨가 출옥한 후 나는 그를 만나기만 하면 넌지시 이제 교회에 나가야 되지 않겠느냐고 권유했다. 그러면 그는 "불심이 깊은 어머니가 살아 계실 때 불효를 저지를 수 없으니 나에게 강요하지 말라"고 말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에 그는 "이제 변명할 말이 없어졌다"며 웃었다.

노씨는 요즘 나에게 "기독교인들에게 둘러싸여서 어쩔 수 없이 교회에 나가게 되는 상황이 벌어질 것 같다"고 말한다. 딸 소영씨와 며느리가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데다 김옥숙씨도 믿음을 갖게 되었다. 노씨는 군복을 입었을 시절에 일산에 교회를 지은 적도 있다는 얘기도 했다.

노씨는 감옥에 있을 때 내가 찾아간 것에 대한 감사의 의미로 99년 추수감사절에 수원의 중앙기독초등학교와 우리 집을 방문했다. 그는 특별히 아내를 치하했다.

"미국에서 가난한 나라로 시집와서 어려운 환경을 딛고 훌륭하게 잘 적응한 것과 자녀들이 잘 자란 것을 보니 참 대견합니다."

내가 늘 아내에게 하고 싶었던 얘기를 대신 해주어서 몹시 고마웠다.

전두환씨와 노태우씨는 자리를 함께 하는 일이 매우 드물다. 꼭 필요한 일이 아니면 함께 자리를 하지 않는 건 다 아는 일이다. 그런 분들이 2000년 8월 나의 이야기를 쓴 『그를 만나면 마음에 평안이 온다』 출판기념회를 할 때 나란히 참석했다.

노씨는 사람을 편하게 해주는 스타일이다. 자기를 드러내려 하지 않는 온순한 사람이다. 그는 참고 기다리는 형이다. 그는 자신이 '물대통령'이라는 얘기를 들으면서도 참고 기다린 이유를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국민 앞에서 민주주의 하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에 우유부단하고 약한 대통령으로 인식된다 하더라도 자율적으로 민주주의가 일어설 수 있도록 기다렸습니다. 나는 주변 사람들에게 참용기에 대해 얘기하곤 합니다. 참고, 용서하고, 기다리는 것이 참 용기지요. 강하게 다스리는 것이 통치방법으로는 가장 쉽지만 민주주의를 후퇴시키지 않기 위해 참용기를 늘 생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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