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때 친구들 '비밀의 공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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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55면

나는 서울 사람이다. 모두가 아는 얘기지만 서울 사람처럼 재미없는 이력은 없다. 게다가 8학군 출신이다.

압구정동의 한양쇼핑센터(현재 갤러리아 백화점)와 그 동네의 새로운 아파트들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자본의 소비의 문화가 탄생한 기이한 아파트의 제국에서 나는 중·고등학교를 다녔고, 지금도 강남의 원룸에서 산다.

사실 얼마전 혼자 살 집을 얻으러 서울의 이곳 저곳을 돌아다녀 보았지만 사실 강북으로 집을 정하기가 쉽지 않았다. 일단 영화사가 밀집한 지역이 강남이고, 강남의 문화를 싫어하지만 강남에 익숙한 내가 강북에 새로운 적응을 하기가 불편할 거란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게 마음의 고향으로 생각하는 곳을 묻는다면 대답은 강북의 회기동이다. 태어난 곳은 석관동이지만 기억 속의 가장 아름다운 유년 시절은 회기동에서의 날들이었다.

언덕들로 연결된 좁은 골목들과 담넘어 이웃들과 꼬마 친구들, 주택가 뒤편에서 벌였던 쑥이 많은 공터의 비밀의 동맹, 아카시아 나무의 향기와 얼음땡 놀이, 옆집의 단짝 친구와는 언제나 서로의 옥상 위에서 만나곤 했고, 망토를 걸치고 날 수 있다는 상상이 현실적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자주 옥상에서 뛰어내려 부모님을 걱정시키곤 했다.

유치원과 국민학교를 홍릉 주변에서 다녔는데, 아침마다 국민학교까지 뛰곤 했다. 걸어서 학교를 간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아버지는 왜 그렇게 달리는지 이유를 묻곤 했지만 나는 그 이유를 잘 몰랐다.

우리집은 과학기술원 건너편 구불구불한 언덕으로 된 주택가의 꼭대기에 있던 단층의 작은 마당이 있던 주택이었다.

그 집에서 차로로 나와 홍릉국민학교까지는 나이 오래된 키큰 은행나무가 늘어서 있었다. 나는 한번도 쉬지 않고 단숨에 학교까지 달리기를 했었다. 지칠줄 모르던 심장과 폐가 박동치며 학교까지 전력으로 달리기를 하면 귓가엔 빠르게 스치는 바람소리가 들렸고, 전속력으로 달리면 어떤 다른 세계로 이동할 것 같은 두근거림이 있었다.

지금의 강남의 아이들에겐 그들이 달릴 곳도, 이웃의 친구와 어울려 매일 좁은 골목들을 누비며 그들의 비밀의 공간과 상상을 할 시간도 여유도 없음이 못내 안타깝다.

내가 중학교를 강남에서 다닌 이후로 그런 마술의 시간과 공간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송일곤<영화 '꽃섬'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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