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와 울고웃고… 격동 현장 뒷바라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50면

어제 7일은 '신문의 날'이었다. 기자의 사명은 생생한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다. 이런 그들을 말없이 도와주는 사람들이 있다. 기자실에서 근무하는 여직원들이다. 이들은 때때로 기자들과 함께 역사의 현장에 서 있었고 격동의 시간들을 함께 보냈다. 이들 중엔 기자실에 청춘을 묻은 사람도 있다. 국방부 김안중(金安中·45)·재정경제부 박미란(朴美蘭·45)·보건복지부 김희옥(金喜玉·42)·교육부 남궁양숙(南宮淑·37)씨 등이 그들이다. 길게는 26년, 짧게는 16년 동안 언론인들과 희로애락을 함께 했던 이들에게서 애환과 생생한 경험담을 들어봤다.

#1. 기자실 안주인들이 밝히는 비사(秘史)

"1979년 신(新)군부 집권의 분수령이 됐던 12·12사태 당시의 일이었어요. 아침에 국방부에 출근해보니 청사의 대리석 외벽 이곳 저곳에 깊게 패인 총탄 자국이 있었죠. 정말 섬뜩했어요. 그날 새벽에 신군부파 군인들이 국방부를 접수하는 과정에서 경비 병력들과 전투를 벌였던 흔적이었죠. 국방장관마저 피신하는 상황이었으니… 그날 이후로 국방부 기자실은 벌집 쑤셔놓은 것 같았죠. 수백명의 기자들이 몰려 좁은 기자실이 터져나갈 정도였어요."

국방부 기자실에서 26년째 근무하고 있는 김안중씨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정부 중앙부처 기자실 근무 여직원 중 최고참인 김씨는 살벌한 분위기에서도 기자들의 배짱은 대단했다고 회고했다.

"중앙일보 K기자와 J사진기자는 어떻게 알았는지 특전사 병력이 국방부를 접수하러 온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었어요. 캄캄한 새벽에 탱크와 중무장한 군인들이 막 국방부로 들어서려는 순간, J사진기자가 카메라 플래시를 터뜨리며 사진을 찍은 거예요. 물론 군인들도 깜짝 놀랐겠죠. 두사람은 현장에서 붙잡혀 모처로 끌려가 곤욕을 치렀죠. 조사받는 과정에서 필름도 빼앗기고… 결국 그들의 기사는 제대로 게재될 수가 없었어요. K기자는 며칠 후 풀죽은 모습으로 기자실에 나타났죠."

이들은 또한 우리 언론의 암울했던 시기를 현장에서 지켜본 산 증인이기도 하다. 본격적인 언론통제는 박정희(朴正熙)전 대통령이 추진했던 72년 유신(維新) 이후 시작됐다고 이들은 입을 모았다. 이같은 분위기는 6공화국 노태우(泰愚) 정부 때까지 이어졌다고 했다. 심지어 정부 부처 공보관이 헌병을 동원해 출입기자를 기자실에서 끌어내는 사건까지 있었다고 김안중씨는 말했다.

"80년대 초 KBS 모기자가 오랜만에 특종을 하고 기분좋게 기자실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였어요. 갑자기 공보관이 헌병들을 데리고 기자실에 나타나더니 '야, 헌병, ××× 끌어 내"라고 소리치는 거예요. 그 기자는 영문도 모르고 헌병들에게 양팔을 붙들린 채 모처로 끌려갔죠. 아마 그같은 상황이 발생했던 것은 공보관이 평소 그 기자에 대해 갖고 있던 불편한 감정도 한몫했을 거예요."

이런 직접적인 언론 통제는 93년 김영삼(金泳三·YS)정부가 들어서자 사라졌다고 한다.

#2. 기자들과 함께 한 희로애락

재정경제부 기자실에서 77년부터 근무하고 있는 박미란씨. 그는 때때로 기자들이 '일하는 기계'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안쓰러울 때가 많다고 했다.

"97년 말 갑작스런 외환위기로 온 나라가 휘청거릴 때 재경부 기자실은 평소의 세배 가까운 기자들이 몰려 들었어요. 당시 기자들은 언론사별로 하루 평균 열두건 이상의 기사를 작성한 걸로 기억해요. 한 언론사에서 두명 정도가 출입했으니까 한 사람당 최소 6건 이상을 써야 할 정도로 일이 많았죠. 매일 새벽에 출근해 새벽에 퇴근하는 일과가 반복됐지요. 당시에는 기자들도 우리들도 모두 파김치가 됐습니다."

朴씨는 또 오랫동안 기자실에 근무하다 보면 주변 동료들에게서 소외당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고 했다.

"기자들과 워낙 친밀하게 지내다 보니 다른 부서의 어떤 공무원은 언론사에서 파견한 직원이 아니냐고 오해할 정도였어요. 기자실 여직원들은 신분상 공보실 소속의 공무원이지만 솔직히 공보실과 기자실간의 문제가 생기면 기자실쪽으로 기우는 것이 사실이죠. 매일 하루종일 접하는 사람들과 더 친해질 수밖에 없거든요."

교육부에서 16년간 근무한 남궁양숙씨는 이런 이유로 인해 불이익을 당하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남궁씨는 "다른 부서의 공무원들에게는 컴퓨터가 지급되는데 기자실 여직원에겐 그렇지 않아요. 이유를 알아보니 혹시라도 컴퓨터를 통해 내부 정보가 기자들에게 유출될까봐 우려해서 그런 것이라고 하더라고요. 어떤 때는 정말 내가 공무원인지 언론사 직원인지 헷갈릴 때도 있어요"라고 말했다.

#3. 변화된 기자실 분위기

요즘은 기자실에서 바둑을 두는 기자들의 모습을 찾아보기가 힘들다. 하지만 10년전만 해도 자욱한 담배연기 속에서 기자들이 바둑을 두거나 화투를 치는 모습이 흔했다고 이들은 말했다.

남궁씨는 "요즘 기자들을 보면 측은한 생각마저 든다"며 "90년대 초반 각 신문사들이 증면(增面)경쟁에 뛰어들면서 기자들의 여유가 사라졌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대부분의 기자실이 자체 회의를 거쳐 금연실이 된 것도 과거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던 일"이라고 그는 덧붙였다.

23년째 보건복지부 기자실을 지키고 있는 김희옥씨는 "휴대전화·삐삐가 없던 시절에는 언론사에서 자사 기자를 찾는 전화가 오면 사우나에 간 경우에도 취재하러 갔다고 거짓말을 한 적이 종종 있었다"며 "지금은 휴대전화로 직접 연락하기 때문에 기자들이 꼼짝할 수 없다"고 말했다.

#4. 기자실 여직원은

국방부 김안중씨는 99년 정부의 공무원 감축 방침에 따라 명예퇴직을 했다. 그러나 한달만에 그는 다시 국방부 기자실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출입기자들이 그가 없으면 일을 할 수 없다고 아우성을 쳐 국방부에서 특채 형식으로 복직시켰던 것이다. 그는 현재 6급 상당 공무원으로 근무하고 있다.

김씨처럼 오랫동안 기자실에서 근무한 경험이 있는 여직원은 기자실에서 없어서는 안될 존재다. 이들이 하는 일은 보도자료 배포·전화응답·복사·팩스전송 등으로 단순한 일처럼 보인다. 하지만 풍부한 경험을 가진 이들의 상황 판단력과 순발력은 대단하다. 공보실 소속 공무원인 이들이 다른 부서를 마다하고 기자실 근무를 고집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고 한다.

"진실을 추적하겠다는 신념에 찬 기자들을 보면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는 데 저절로 힘이 생기죠."

아직 미혼인 재경부 박미란씨는 "젊은 시절 기자들과 함께 정신없이 바쁘게 살다보니 결혼이 늦어졌다"며 "재경부를 거쳐간 많은 경제부 기자들이 나의 신랑들인 셈"이라며 웃었다.

최익재 기자

국방부·재경부·교육부·복지부 기자실의 도우미들. 길게는 26년 짧게는 16년, 한 자리를 지켰다. 격동의 세월 속에 지나간 12·12사태·언론 통폐합·외환위기…. 이들에게는 아직도 생생한 역사의 현장이다.

이들이 하는 일은 얼핏 보면 단순하다. 보도자료를 나눠주고 전화·복사·팩스등을 처리하는 것.하지만 순간순간 뉴스가 나올 때마다 상황을 판단하고 재빠르게 일처리를 하는 순발력이 생명이다.

오랫동안 기자실에서 일하다 보니 자의반 타의반 반(半) 언론인이 된다. 모르는 사람은 언론사 파견직원으로 볼 정도. 신분상으로는 공무원이지만 공보실과 기자실에서 문제가 생기면 기자실 쪽으로 마음이 기우는 건 어쩔 수 없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