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銀총재의 임기 보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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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법조문만으로 얘기한다면 예전의 한국은행 총재는 이 나라에서 가장 훌륭한 사람이 임명돼야 하는 자리였다. 1950년 제정된 한은법에서 총재는 '고결한 인격과 금융에 대한 탁월한 경험'을 갖춘 사람이어야 한다고 못박았던 것이다. 통화가치의 안정이라는 막중한 임무를 짊어지고 출범하는 중앙은행의 대표 자리에 아무나 앉힐 수는 없다는 법안 작성자들의 정신이 담겨 있었다.

때로는 정부 내의 야당役

대통령한테도 요구하지 않은 높은 도덕성을 규정한 이 조항이 관리들한테는 못마땅했지만 고치자는 소리를 못한 채 반세기가 지났다. 그러다 97년 말 새 한은법이 만들어지면서 이 부분은 자취를 감추고 만다. 이젠 한은총재도 대통령처럼 아무나 할 수 있는 자리가 됐다는 농담도 나올 만하다.

그렇지만 다행히 새로 4년 임기를 시작하는 박승 총재는 과거 기준으로 보더라도 인품과 경륜 면에서 흠이 없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문제는 내년에 만약 정권이 교체된다면 그가 임기를 못채울 것으로 보는 이들이 많다는 것이다. 경제의 안정성장을 위해서는 중앙은행이 때로는 정부 내의 야당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중립적인 통화정책을 추구해 가야 한다. 그러자면 정책을 다루는 총재와 금융통화위원회 위원들의 신분과 임기는 정권교체에 관계없이 보장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미국의 경우 앨런 그린스펀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의장은 87년 공화당의 레이건 대통령에 의해 임명됐지만 민주당의 클린턴 정부 때도 재임명돼 15년째 그 자리를 지켜나가고 있다. 이에 앞서 전설적인 인물 윌리엄 마틴은 51년부터 19년간 연준의장으로 근무했었다. 이 두 사람이 '경제대통령'으로 군림한 때가 미국 경제의 황금시기였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그만한 장기집권은 아니더라도 첫 임기만큼은 채워주는 것이 좋으련만 우리나라에서는 대통령이 바뀌면 거의 언제나 한은총재도 경질되곤 했다.

이에 대한 대책으로 식자들이나 한은 노조 또는 시민단체들이 임기보장을 외쳐댄다고 해서 충분하지는 않다고 본다. 총재 스스로도 자리를 지키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부나 야당 눈치를 봐가며 연명해 가라는 주문이 아니라 중요한 자리니만큼 본인은 물론 후임자와 중앙은행·국가경제를 위해 정당한 자세로 임기를 채울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고 노력해야 한다는 뜻이다. 클린턴인들 그린스펀을 자르고 싶지 않았을 리 없다. 그리고 자기 진영의 적격자를 그 자리에 앉히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할 수 없었던 것은 금융계와 국민이 그린스펀의 연준을 신뢰하고 후원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은도 이만한 신뢰와 지지를 얻으려면 무엇보다 정부나 정치권 또는 오도된 여론에 휘둘리지 않고 법에 정해진 대로 중립적인 정책을 수립, 집행해 가야 한다. 경제환경이 과거와는 크게 달라짐에 따라 앞으로는 정책 선택을 두고 정부와 한은간에 적지 않은 마찰이 예상된다. 한은으로서는 나름대로의 분석에 의해 거품이나 물가불안의 징후를 찾아낸다면 정부의 눈치를 살필 것 없이 선제적인 대응책을 강구해 나가야 할 것이다.

금융계와 국민이 신뢰해야

한은으로서 또 한가지 염두에 둬야 할 일은 대국민·대금융계 서비스를 강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들의 이해와 협조가 없이는 통화정책이 소기의 효력을 발휘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중앙은행의 위상 또한 제대로 정립해 가기 어렵기 때문이다. 한국은행은 '은행의 은행'이면서도 서비스정신이 없다거나 완고하고 고압적이어서 정부쪽보다 더 관료적이라는 비판들이 적지 않았다. 앞으로는 시중은행을 동료로 여기고 금융문제를 함께 고민해 가며 선도해 가는 자세로 바뀌어야 할 것이다. 아울러 풍부한 연구인력을 최대한 활용해 중요 경제문제에 관해 한은의 목소리를 높임으로써 국민의 관심과 이해를 촉구해 나가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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