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 제2부 薔薇戰爭 제2장 揚州夢記 : 장보고·정년 총애한 왕지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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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장보고와 정년이 왕지흥 군진에 소속된 것은 결과적으로 행운이었다.

왜냐하면 군장이었던 왕지흥은 최하말단이었던 아졸 출신이었으므로 자연 출신 성분을 따지지 않고 용맹하고 무용이 뛰어난 병사를 총애했으며, 특히 싸움에 임하여 용감히 싸우는 병사는 특진을 시키는 용장(勇將)이었기 때문이었다.

입대하자마자 장보고와 정년은 곧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장보고는 특히 활을 잘 쏘았고, 정년은 말을 타고 창을 휘두르는데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하였기 때문이었다.

『중국통사(中國通史)』에 의하면 '당 태종은 매일 십이위소장(十二衛小將)과 사병 수백명을 거느리고 현덕전 앞에서 활쏘기를 연습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중국에서도 활을 잘 쏘는 병사를 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장보고의 원 이름이 『삼국사기』에는 궁복(弓福)으로 되어있고, 삼국유사에는 궁파(弓巴)라고 되어 있어, 그 이름에 활궁(弓)자가 들어가 있는 것을 보아 활을 잘 쏘는 선사자(善射者)임에 틀림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무예는 장보고보다 나이 젊은 정년이 한 수 위였다.

두 사람의 용맹에 대해서 두목은 『번천문집』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두 사람이 모두 싸움을 잘하여 말을 타고 창을 쓰는데 그 본국 신라에서는 물론 서주에서도 능히 대적할만한 자가 없었다. 정년은 또한 능히 바다 밑으로 들어가 50리를 걸어가도 숨이 막히지 아니하였다. 그 용맹과 씩씩함을 비교하면 장보고가 정년에게 조금 뒤졌으나 장보고는 연령으로, 정년은 기예로 서로 지지 아니하였다." 두목이 정년의 수영실력을 기록한 것은 이례적으로 보인다. 물론 장보고와 정년은 두 사람 다 해도인 출신이었으므로 수영과 잠수에 뛰어난 실력을 갖고 있었을 것이다 두목이 '바다 밑으로 들어가 50리를 걸어가도 숨이 막히지 아니하였다'고 정년에 대해서 기록한 것은 어쩌면 정년이 바다 밑으로 숨어 들어가는 특수한 공작을 담당하였던 특수요원이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왕지흥이 이끄는 군사는 이사도와의 첫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는데, 그때의 전과가 『자치통감』에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즉 이사도의 평로치청군 9천명을 격파하고, 우마 4천두를 노획하였던 것이다. 이 때 혁혁한 전과를 올린 사람은 단연 장보고와 정년이었다. 무령군의 아군(牙軍)소속으로 마창병(馬槍兵)이었던 정년은 곧 지휘관이 되었고, 기사병(騎士兵)이었던 장보고 역시 곧 지휘관이 되었다. 이 지휘관을 압관(押官)이라 하였는데, 이는 병사 5백명을 거느릴 수 있는 책임자였던 것이다.

특히 대총관이었던 왕지흥은 장보고와 정년에 대해 각별한 총애를 하고 있었다. 비록 신라인이었지만 전투에 나서서는 한발짝도 물러서지 않는 임전무퇴의 용맹으로 인해 왕지흥은 두 사람을 마치 자신의 친아들처럼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다.

왕지흥의 대승으로 초반 기세가 꺾인 평로치청군은 서서히 멸망의 길을 걷고 있었다.

원화 13년(818) 7월에는 창주절도사 정권이 복성현을 점거하였으며, 10월에는 이원의 뒤를 이어 무령군 절도사가 된 이색이 연주를 점유하였다. 또한 전홍정(田弘正)이 운주를 압박하므로 평로치청군은 후퇴하여 간신히 목숨만을 유지할 뿐이었다.

그러자 왕지흥은 최후의 일격을 가함으로써 자신의 힘으로 이사도의 목을 베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자칫하다가는 일등공신이 될 수 있는 기회를 다른 군진들에게 놓칠 것을 두려워했던 왕지흥은 819년 4월 독단적으로 무령군을 이끌고 이사도의 마지막 보루인 운주성을 향해 진격하였던 것이다.

일개 아졸에서 출발하였던 왕지흥은 이번을 자신이 절도사가 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번에 무공을 세울 수 있다면 번진 최고의 번수인 서주 절도사가 될 수 있음이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얕잡아 보고 선제공격을 서둘러본 왕지흥은 뜻밖에 위기에 봉착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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