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게돈 실패가 나에겐 좋은 경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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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7면

만화가 이현세(46)씨가 돌아왔다. 애니메이션 감독으로서다. 1996년 극장판 애니메이션 '아마게돈'의 흥행 실패, 그리고 97년 시작한 만화 '천국의 신화'에 대한 검찰의 음란성 시비. 그 6년여의 세월동안 '대한민국 최고의 만화가'는 펜을 잡지 못했다. 협심증 증세까지 생겼다고 했다. 그리고 2002년 3월 26일. 그는 '이현세 엔터테인먼트'라는 새 배를 자신의 인생 위에 출범시킨다. 극장판 애니메이션 '천국의 신화'프로젝트라는 돛을 활짝 펴고.

서울 강남구 포이동의 한 건물 옥탑방에 있는 그의 화실을 찾았을 때, 그는 흰색 라운드티 위에 베이지색 티셔츠를 받쳐 입은 편안한 모습이었다. 한때 바싹 깎은 스포츠형 머리에 뻣뻣한 구레나룻으로 강인한 남성미의 상징이었던 그도 이제는 앞머리를 곱슬거릴 정도로 기르고, 수염도 깎고, 건강을 위해 담배도 끊은 전형적인 중년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가 왜 다시 애니메이션을 시작하게 됐을까.

"'아마게돈' 당시 무책임했다는 반성을 많이 합니다. 하는 것마다 히트를 쳐서 '미다스의 손'이라 불릴 때였으니 뭐 만화영화도 잘 되겠지 하고 자신만만했지요. 25억원짜리 프로젝트가 깨지면 한국 애니메이션계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생각해본 적도 없고-. 당시 회사 내에 애니메이션 전문가가 거의 없었다는 것도 문제였죠. 명색이 총감독인데 '남벌'그리는 데만 정신이 팔린 나도 그렇고."

그는 자신이 영화를 너무 몰랐다는 것에 화가 나 새롭게 영화 공부를 했다고 말했다. 영화 감독들과 만나 술잔을 기울이며 어떻게 콘티를 짜는지, 장면 연출은 어떻게 하는지를 배웠다고 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대박을 떠뜨리는지는 아직 몰라도 어떻게 해야 망하지 않는지는 알게 됐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천국의 신화'를 택한 걸까. 그는 한달 전께 각 대학 애니메이션 학과 학생·대학원생·국내 메이저 제작사 기획실 직원들과 워크숍을 열었다. 어떤 작품을 어떻게 만들어야 좋을지 중론을 듣기 위해서였다.

"여러 의견이 나왔죠. 한국에서는 애니메이션 성공 사례가 아직 없기 때문에 미국식이냐 일본식이냐로 논의가 모아졌는데, 어설픈 따라하기는 반드시 실패한다는 얘기였어요.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 내가 평생 추구해온, 서사적이면서도 비극적 구조를 지닌 액션이 가미된 이현세식 애니메이션을 만들자. 그것도 재미있게. 그거였지요."

이씨의 애정이 듬뿍 담긴, 동아시아 상고사를 다룬 만화 '천국의 신화'에서는 제목과 배경만 따오고, 나머지는 모두 새로 구성할 예정이다. 이를 위해 8월까지 시나리오 작가와 중국으로 답사를 다녀오고 전문 감독을 초빙해 스토리보드 내용도 논의할 계획이다. 배경의 색채와 음악도 이씨가 매우 신경쓰는 대목이다.

우리 조상의 웅혼한 기상을 다룰 이 작품은 초등학교 저학년용은 아니다. 그는 "가장 아름답고 가장 슬프면서도 가장 잔혹하고 동시에 가장 섹시한 작품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주인공도 중성적 매력을 지닌 여성캐릭터를 내세울 것을 검토 중이다.

2년6개월에 걸쳐 약 40억원이 들어갈 이 프로젝트의 자금조달은 이미 마무리된 상태. 26일 경기도 부천시에서 9개 애니메이션 제작사들이 한 건물에 입주하는 '경기디지털아트하이브' 개막식에 참석한 뒤 그는 이곳에서 처음으로 '회사대표'의 직함을 갖고 새 일을 시작한다.

그는 "내 작품 전에 국내에서도 흥행에 성공하는 애니메이션이 나왔으면 좋겠다. 애니메이션도 투자할 만하다는 것을 보여줘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어떤 신조로 작업에 임하느냐는 질문에 그는 "객관적이려고 노력 중이다. 만화를 그릴 때는 내 맘대로였다. 영화는 아니다. 나만 재미있으면 안된다. 그 매커니즘에 적응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천국의 신화'는 지난해 서울고법에서 무죄판결을 받았지만 검찰의 항고로 현재 대법원에 계류 중이다. 재판이 완결되려면 2년은 더 있어야 한단다. 하지만 그에겐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생겼다. 한국 애니메이션사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우는 일. 그런 이현세 감독의 행보를 지켜보는 일은 이제 우리 모두의 몫이다.

글·사진=정형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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