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성에 대하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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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고구려 고분 벽화를 보면 쇠머리를 한 인신우수(人身牛首)의 신이 손에 벼 이삭을 들고 있는 모습이 있다. 인간을 위해 농업과 의약을 발명한 신농(神農)인 것이다. 그런데 그리스 로마 신화에도 똑같은 인신우수의 존재가 있는데 그것은 미노타우로스라는 식인 괴물이다. 크레타섬 미노스왕의 미궁에 살고 있던 이 괴물은 훗날 영웅 테세우스에 의해 살해된다. 신화의 세계에서 동물은 신성시되거나 인간과 비슷한 대우를 받는다. 다만 인간 중심의 경향이 강한 그리스 로마 신화의 경우 동물성이 다소 폄하돼 인간과 동물의 복합적 존재는 대개 영웅이 퇴치해야 할 사악한 괴물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동물을 신성시하는 것은 논외로 하더라도 최소한 인간과 동등하게 보아야 하느냐, 아니면 여전히 인본주의적 관점을 견지해야 하느냐 하는 문제는 생태주의자들 사이의 중요한 쟁점 중의 하나다. 여기에서 동물은 결국 자연을 대표하는 것이기도 한데 심층생태학(Deep Ecology)의 입장에서는 동물도 인간과 동등한 권리의 주체임을 주장한다. 그들은 동물이 '사회계약'아닌 '자연계약'의 존재며 설사 동물이 지력(智力)에서 인간보다 뒤떨어진다 해도 저능아라고 인권을 말살할 수 없듯이 동물이라고 그 권리를 무시해서 안된다는 논리를 편다. 이미 1978년 프랑스 일각에서는 '동물해방선언'을 통해 동물의 존엄성, 즉 동물권(Animal Rights)을 제창한 바 있다. 그들은 선언한다. "모든 동물은 동등하게 태어나고 모든 존재에 대해 동등한 권리를 갖는다"고. 심층생태학의 이같은 급진적인 주장에 다 동의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어쨌든 급박해진 환경 문제에 대처하기 위해 인식의 혁명적 전환을 모색하는 그들의 심정을 십분 이해할 수는 있다.

동물학자 최재천 교수의 『개미제국의 발견』(사이언스 북스·1999)은 감성적인 필치와 흥미로운 내용으로 몇해 전에 이미 대중적 관심을 끌었던 책이다. 이 책은 앞서 제기된 인간과 동물의 관계성, 그리고 차제에 새롭게 설정할 필요가 있는 동물의 지위와 관련해 다시금 성찰의 여지를 갖게 한다. 최교수는 개미 사회를 정치·경제·문화의 세 가지 측면에서 고찰한다. 놀랍게도 개미는 인류보다도 먼저 농경과 목축 생활을 영위해 왔다. 나뭇잎을 물어다 그 위에 버섯을 기르는가 하면 진딧물과의 공생관계에서 이득을 취하기도 한다. 그들은 이러한 경제활동에서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철저한 분업제도를 택하고 있다. 개미 사회의 문화 역시 우리의 예상을 뛰어 넘는다. 개미는 후각에 바탕한 정교한 화학언어를 구사한다. 그런가 하면 이들의 화학언어를 해독해 등쳐먹는 기생곤충들도 있다. 일개미들의 직업도 다양하다. 시녀와 보모에서 노동자와 군인까지. 개미 사회의 정치야말로 가장 우리의 관심을 끄는 대목이다. 극도의 자기 희생 위에 이뤄진 군주 정치와 노예제도, 개미는 동물중 인간을 제외하고는 거의 유일하게 전쟁을 일으켜 대량학살의 만행을 저지르는 족속이며 인간처럼 정권 다툼도 불사한다. 따라서 최교수는 고도로 조직된 사회 속의 현대인과 가장 닮은 동물로 서슴지 않고 개미를 추천한다.

개미와 인간이 닮은꼴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고대인들도 일찍부터 인식했던 것같다. 중국 당(唐)나라 때 이공좌(李公佐)가 지은 『남가태수전(南柯太守傳)』이라는 소설에서 주인공 순우분(淳于芬)은 낮술에 취해 잠들었다가 자기 집 뜨락의 느티나무 뿌리 속으로 들어가는 꿈을 꾼다. 그는 지하왕국에서 공주와 결혼해 출세가도를 달리다가 만년에 간신의 참소를 받아 불우한 나날을 보낸다. 임금의 명에 의해 본래의 세상으로 돌아온 순간 정신이 들고보니 한바탕 꿈이었다. 그래서 느티나무 밑을 파보았더니 개미굴이 있더라는, 환상적이면서도 출세지향적 현실을 풍자하는 내용이다. 최근 유행한 바 있는 베르베르의 공상과학소설 『개미』 또한 우리가 고래로부터 지녀왔던 개미와 인간간 동일시의 감정에 근거하고 있음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개미를 실례로 들었지만 고대인들의 동물과의 동일시는 두 가지 방면으로부터 비롯한다. 한 가지는 실증적인 차원으로 동물 생태에 대한 관찰과 경험으로부터 온 것이고 다른 한 가지는 정신적인 차원으로 인간과 동물이 교감했던 시절의 신화적 감수성으로부터 온 것이다. 얼마전 미국에 갔다가 구렁이를 목에 감고 다니거나 곰을 개처럼 끌고다니는 젊은이들을 보고 놀란 적이 있다. 애완동물의 범주가 이렇게 확대되면 어디까지 갈 것인가? 근대 이래 강화돼온 인간의 주체로서의 지위는 그동안 일방적인 희생을 감내해 왔던 자연의 소리없는 반격으로 조절이 불가피하게 됐다. 이제 동물성은 비하의 대상만은 아니다. 과연 동물권은 어디까지 복권될 것인가?

<이화여대·중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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