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분 1초가 死線"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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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서울에 도착할 때까지 마음을 차분히 갖고 용기를 잃지 않기를 기대한다."

중국 베이징(北京)의 스페인 대사관에 지난 14일 진입했던 탈북주민 25명이 필리핀을 거쳐 서울로 온다는 소식을 접한 탈북자 장길수(18·사진)군은 15일 '난민농성' 선배로서 충고를 던졌다.

길수군 가족 7명도 2000년 6월 26일 베이징 유엔 난민고등판무관실(UNHCR)에서 기습농성을 벌인 지 나흘 만에 이번처럼 필리핀을 거쳐 서울로 왔다.

서울 B고교 1학년에 재학 중인 길수군은 점심 급식시간을 틈타 기자와 가진 전화통화에서 "서울 땅에 발을 디디는 순간까지 얼마나 겁이 나겠느냐"며 걱정했다. 길수군은 탈북자 일행에 섞여 있는 어린 학생들이 특히 마음에 걸리는 듯했다. 가장 나이어린 이진화(10)양을 포함해 이번 탈북자 일행에 길수군보다 나이어린 '아이들'은 9명.

지난해 6월 당시 각오를 다지고 농성에 들어가긴 했지만, 북한으로 송환될지 서울로 갈지 몰라 1분 1초가 초조했던 경험을 길수군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기 때문이다."부모 모두 북에 남아 있는 같은 처지라 그런지 고아 두 명이 유난히 눈에 띈다"고 길수는 안쓰러워 했다.

길수군은 또 이번 탈북자들이 중국정부로부터 '난민' 지위를 인정받지 못했다는 소식에 "끝까지 싸워 난민 인정을 받기 바랐는데…"라며 안타까워했다.

형 한길(20)씨, 외할머니 김춘옥(69)씨 등 가족들과 서울 양천구의 20평 임대아파트에 살고 있는 길수군은 지난 2일 남한의 신입생보다 2년 늦은 늦깎이로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원활한 적응을 위해 하나원에서 적응 교육을 끝낸 뒤 지난해 10월부터는 중학교 검정고시학원과 컴퓨터 학원에 빠지지 않고 다녔다.

또 자력갱생(自力更生)하는 힘을 키우기 위해 용돈은 스스로 번다는 원칙도 세웠다. 무슨 억척이냐 싶었지만 '광고 전단 돌리기' 등 아르바이트도 하루에 서너시간씩 했다.

"북한과 전혀 다른 남한에서 성공하려면 열심히 노력하는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니냐"는 게 길수군의 어른스러운 말이다.

정효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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