벗긴다고 정신력 강해지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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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머릿 속에 한장의 사진이 떠올랐다.

베트남 전쟁에서 네이팜탄 폭격으로 부모를 잃고, 불붙은 옷을 벗어던진 뒤 절규하며 뛰어가던 어느 알몸 소녀의 모습. '알몸으로 태어나서 옷 한벌은 건졌잖소'라는 노래 가사처럼 사람이 최소한 가질 수 있는 단 한벌의 옷도 입지 못한 채 의지할 사람도 없이 어디론가 정신없이 가고 있던 그 소녀의 사진이.

지난 3일 광주에서 벌어졌던 일이다. 모초등학교 야구팀 감독이 선수들의 팀워크를 다지고 정신무장을 새롭게 한다는 이유로 어린 선수 5명의 옷을 모두 벗겼다. 그리고 알몸으로 학교 주위를 뛰게 했다. 그 학교는 충장로에서 약 5분 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시내 중심가에 위치해 있었다. 오가던 시민들이 놀란 시선으로 그들을 쳐다봤다.

그 야구팀의 감독은 당시 진행 중이던 소년체전 광주예선에서 팀이 2연패하자 몹시 화가 났고 남은 경기에서나마 이겨보자는 뜻에서 선수들의 해이해진 기강을 바로잡는다며 알몸 구보를 지시했다고 한다. 그날 그 사건으로 감독은 해임됐고 야구부장은 전보조치됐다.

정신력·팀워크·집중력·승부근성·뚝심….

우리에게는 체력·전술·개인기 등 실력 측면보다도 이같은 단어들로 대표되는 정신적 측면에서의 상승 효과를 위해 극한 상황에 처하게 하는 훈련이 낯설지 않다. 프로야구에서도 군 부대에서 유격훈련 하기, 오대산 눈밭을 맨발로 걷기, 얼음 깨고 몸 담그기 등이 유행하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세월은 흐르고 시류(時流)는 변한다. 요즘 그런 훈련을 했다가는 선수들로부터 '인권침해'로 되몰릴지도 모른다.

선수를 윽박지르고 강압적인 체벌과 얼차려로 경기력을 향상시키던 시대는 지났다. 지금은 '경기의 이해'와 '창의력·응용력 개발을 통한 집중력 향상'이 실전에서도 더 큰 효과를 보고 있는 시대다.

박찬호(29·텍사스 레인저스)는 매년 겨울 자신이 실시하는 어린이 야구캠프에서 직구의 일반적 구질인 투심패스트볼과 포심패스트볼의 차이를 체계적으로 설명한다. 국내 초등학교에서는 보기 드문 풍경이다. "실밥을 손가락과 나란히 잡는 투심(two seam)은 공이 한번 회전할 때 실밥이 공기와 두번 만나며, 실밥을 가로질러 잡는 포심(four seam)은 네번 만나게 된다. 이 경우 공기의 저항이 달라져 투심은 홈플레이트 앞에서 볼이 가라앉고 포심은 떠오르게 된다"는 식이다.

그는 "내가 지금 던지는 공이 어떻게 해서 포수 미트에 이르게 되는지 스스로 이해해야 그 구질에 대한 창의력과 응용력이 생긴다. 그래야 자신만의 독특한 구질을 개발할 수도 있고, 특정 상황에서의 대처 능력도 함양된다. 반면 맹목적으로 구질을 '암기'한다면 효율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적절한 지적이다. 선수가 원리를 이해하고 자기것으로 만들었을 때 승부처에서 힘이 생긴다. 무조건 극한 상황으로 내몰아 윽박지르고 고통을 강요해 정신력과 뚝심을 기르던 시대는 끝났다. 그리고 그렇게 다져진 팀워크는 동네 야구에서나 통할 뿐이다.

야구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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