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업 눈치보는 한심한 정치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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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철도가 마비되는 기막힌 사태를 지켜보던 정치권이 어제부터 국회를 다시 연다느니, 대책 마련에 힘을 쏟겠다느니 부산을 떨고 있다. 교통 대란에 잔뜩 화가 나 있는 국민이 정치권도 파업 사태에 책임이 있다는 점을 알아차리자 뒤늦게 나선 것이다.

그러나 근본적인 대책을 내놓기보다 정부와 노조 양쪽을 적당히 비판하는 시늉 정도로 끝날 것 같아 미덥지 못하다. 민영화 문제에 깊이 들어가 힘센 공기업 노조을 자극하다간 지방선거·대선에서 표가 떨어질까봐 여야 지도부가 하염없이 눈치만 보고 있기 때문이다. 공기업 연대 파업의 핵심 쟁점인 철도 민영화 문제를 놓고 한나라당은 뒤로 미루려 하고 있고, 민주당도 꺼림칙해 한다. 어떻게든 '뜨거운 감자'를 만지지 않으려고 요리조리 피하고 손을 빼려는 한심한 모습이다.

공기업 민영화 문제에 대한 정치권의 접근 자세는 '직무 유기' 그 차제다. 철도 민영화 관련 법안이 국회로 넘어온 것은 지난해 11월, 12월 두차례며 가스 부문 민영화 법안도 11월 말에 국회에 제출됐다. 그러나 이들 법안은 관련 상임위에 심의조차 들어가지 않은 채 낮잠을 자고 있다. 민주당은 정부와의 당정 회의에서 정책 조율은커녕 제대로 된 당론조차 내놓지 못하고 있다. 김대중 대통령은 "법 안지키는 노조는 세계 어디에도 없고,철도 경영은 민간이 해야 한다"며 명쾌한 입장을 유지하고 있는 데 반해 민주당 대선 예비 주자 대부분은 "철도 민영화는 더 검토할 부분이 있다"며 어정쩡한 태도다. 그야말로 레임덕 상황에서나 볼 수 있는 당정 정책 혼선의 극치다.

철도 민영화 법안 심의가 '시기상조'라는 쪽으로 방향을 정한 한나라당의 자세도 어이없기는 마찬가지다. 국회 의석수 제1당으로 민영화 법안을 못 본 척하다가 이제 와서 노사 협상이 제대로 이뤄지기 힘들 것 같으니까 뒤로 미루자는 무책임한 움직임으로 비춰진다. 대선에서 표가 떨어질 수 있는 민감한 사안 쪽에는 서지 않겠다는 약삭빠른 자세로 보인다. 그러면서 어떻게 "4대 개혁 중 공공 부문이 제일 더디다"고 정부를 질타할 수 있겠는가. 여야 지도부의 의도적인 게으름, 당정 간 정책 조율의 난맥상 탓에 민영화 정책 추진력은 떨어질 수밖에 없고,그런 틈새를 밀고 들어온 게 지금의 파업 사태다.

공공 부문 개혁은 더 이상 뒤로 미룰 수 없다. 철도 민영화는 과거 김영삼 정권 때부터 논의해 왔던 오래된 국가적인 숙제다. 지금이라도 대선 예비 주자를 포함한 여야 모두 민영화 관련 법안에 진지하게 매달려야 한다. 정부의 민영화 정책에 미비점이 있다면 보완하면서 매듭을 지어줘야 한다. 이 문제를 다음 정권에 넘겨선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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