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인표가 이렇게 망가졌어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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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9면

올 서른다섯살의 '탤런트 차인표'는 무한히 복받은 인물이다. 그러나 '영화 배우 차인표'는 지독히 불운하다. 지난 연말 '그 여자네 집'으로 MBC 연기 대상(大賞)을 받음으로써 그는 탤런트로서의 한 시기를 영광스럽게 정리했다. 1994년 '사랑을 그대 품안에'를 통해 혜성같이 브라운관의 총아(寵兒)로 떠올랐던 그 아니었던가.| 단단한 근육질 몸매에 쏘는 듯한 냉정한 눈길, 그 아래 보일 듯 말 듯 감춰진 부드러운 미소. 껄렁한가 하면 반듯하고 매너 있는, 그가 드라마에서 불어댄 색소폰의 저음처럼 묵직하게 풍기는 남성미는 많은 팬들을 매료시켰다.
그리고 극 중에서 만나 결혼에까지 이른 신애라와의 건강해 보이는 연애, 미국 시민권을 포기하고 선뜻 입영 열차에 오른 당당한 풍모. TV 안팎의 이미지가 이처럼 조응하면서 만들어낸 그의 이미지는 '그대 그리고 나''별은 내 가슴에''불꽃''왕초' 등 후속 드라마들에서 지속되었다.
하지만 영화를 고르는 안목 때문이었을까. 차인표는 영화와는 좋은 연분을 맺지 못했다.'접속''쉬리''인정사정 볼 것 없다' 등 결과적으로 화제작이나 흥행작이 됐던 영화들의 출연 요청을 마다하고 선택했던 '알바트로스'(96년),'짱'(98년),'닥터 K'(99년)는 관객의 외면 속에 조용히 간판을 내려야 했다.
그랬던 그가 '이번엔 느낌이 너무 좋다'며 선택한 영화가 '아이언 팜(Iron Palm)'이다. 5년 전 로스앤젤레스로 떠나버린 애인(김윤진)을 찾아 무작정 미국으로 달려가는 어설프면서도 진지한 남자 역을 맡은 것이다. '아이언 팜'은 주인공의 별명으로 뜨거운 모래 속에 손을 담가 가며 무술을 익히는 '철사장'이란 뜻.
영화에서 주인공은 모래 대신 전기 밥솥의 뜨거운 쌀밥에 손을 찌르며 수련하는 코믹한 인물이다. 캐릭터로만 본다면 TV 드라마와 그 동안 출연했던 영화에서의 이미지와는 1백80도 방향을 튼 셈이다. 미국에 유학 중인 육상효 감독이 직접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한 '아이언 팜'은 로스앤젤레스에서 영화 전체를 촬영했으며 대사의 70% 가량이 영어다. 게다가 상당수 스태프도 현지인들로 채워졌다.
차씨는 87년부터 6년간 미국에서 공부를 하고 직장 생활을 했기 때문에 영어 대사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최근 촬영과 녹음을 마치고 귀국한 그는 "TV에서든 영화에서든 고정된 이미지에 매어 있어서 불만이었는데 '아이언 팜'은 이제까지의 내 이미지에 카운터 펀치를 먹일 만큼 색다른 캐릭터여서 무엇보다 마음에 든다"고 했다.
-코믹한 연기를 해보니 어땠나.
"진짜 나한테 맞는 연기는 이런 쪽인 것 같았다. 말쑥하고 정돈된 인물보다는 적당히 '망가지고' 좌충우돌하는 타입이 연기하기에 훨씬 편하고 마음에도 든다. 그동안 너무 틀에 박힌 인물들만 연기해 온 것 같다. 또 시나리오가 재미있고 감독과도 호흡이 잘 맞아 흡족하게 작품을 끝냈다. 관객들의 반응이 기다려진다."
-미국 스태프와 일해 본 느낌은.
"처음엔 서로 어색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가족처럼 친해졌다. 영화 만드는 시스템이 한국과 많이 달랐다. 한국에서는 감독 한 사람 중심으로 돌아가는데 미국에선 감독도 스태프 중의 한 명에 지나지 않았다. 투철한 프로 정신도 돋보였다."
-계속 외국에서 연기할 생각은 없나.
"사실은 몇몇 영화사에서 제안을 받았는데 아직 고민 중이다. 밖에 나가 보니 한국 영화가 좀 더 적극적으로 해외 진출을 모색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LA는 한국 사람들이 많이 거주하기 때문에 소재가 무궁무진하다. LA를 제2의 부산처럼 만들 수도 있을 것 같다. 이런 식으로 점차 해외 네트워크를 형성하면 한국 영화 시장이 크게 넓어질 것이다."
그는 얼마 전 007 제20편에서 꽤 비중 있는 북한군 장교 역을 제안받고 계약 직전까지 갔으나 시나리오를 읽어 보고는 출연을 포기했다.
북한을 악질적인 테러국가로 규정한 데다 한반도 상황을 서양인들이 오락거리로 삼는다는 느낌이 들어서였다. 여전히 '멋진 남자'였다.

이영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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