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있는 아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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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꽃뱀 한 마리가
우리들의 시간을 물고 어디론가 사라졌습니다
바람이 보라색과 흰색의 도라지 꽃망울을 차례로 흔드는 동안
꼭 그만큼의 설레임으로 당신의 머리칼에 입맞춤했습니다
그 순간,내 가슴 안에 얼마나 넓은 평원이 펼쳐지는지
얼마나 아름다운 색색의 꽃들이 피어나는지…
사랑하는 이여, 나 가만히 노 저어
그대에게 가는 시간의 강물 위에 내 마음 띄웁니다
바로 곁에 앉아 있지만
너무나 멀어서 먹먹한 그리움 같은
언제나 함께 있지만 언제나 함께 없는
사랑하는 이여,
꽃뱀 한 마리 우리들의 시간을 물고 어디론가 사라져 돌아오지 않습니다
-곽재구(1955~)'수유나무 아래서-연화리 시편 8'

시를 읽는 것이 사랑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랴. 앞에 두면 눈·코·귀·입 다 알 것 같건만 돌아서면 시간도 강물도 도라지꽃도 가뭇없어 꿈만 같아라. 지금도 거기 미풍에 흔들리는 말의 꽃 대궁. 분명 나도 거기 서 있었는데 왜 손 내밀어 잡으려면 잡히지 않는 걸까? 그래도 모른다곤 말 못하고 언어의 강 저편 아슴아슴 눈에 밟힌다.
김화영<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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