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 제2부 薔薇戰爭 제1장 序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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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삼국사기』의 '흉년과 기근으로 당나라의 절동지방으로 건너가 식량을 구하는 자가 1백70명이 되었다'는 내용대로 그 무렵 중국은 꿈의 대륙이었던 것이다.
일찍이 최치원도 '유자이건 불자이건 할 것 없이 많은 사람들이 앞을 다퉈 입당을 하였다'고 기록하였던 것처럼 철저한 골품제도의 귀족사회였던 신라에서 한계를 느낀 젊은이들이 보다 개방되고 부강한 당나라에서 입신출세를 하기 위해 바다를 건너 도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장보고도 이 무렵 야망을 갖고 당나라로 건너가던 젊은이들 중의 한사람이었다.
장보고가 선택할 수 있었던 유일한 길은 용병(傭兵)이었다.
일찍이 고구려 유민이었던 이정기(李正己)가 세웠던 번진은 산동지방을 지배하던 독립된 왕국이었다. 이정기의 번진은 '평로치청(平盧淄靑)'이라는 이름 아래 막강한 군사력을 가지고 무려 55년간이나 산동성 전역을 통솔하고 있었던 것이다. 장보고가 중국으로 건너갔을 무렵에는 이정기의 후예인 이사도(李師道)가 번수직을 세습하고 있었는데, 그는 장안에 자객을 보내어 재상 무원형(武元衡)을 암살할 만큼 골치덩어리였던 것이다.
이에 당나라의 황제 헌종(憲宗)은 협상론을 무시하고,평로치청군의 토벌을 선언하였다.
이 때가 815년 12월. 당나라의 군사들과 평로치청군의 교전은 818년 7월에 이르기까지 3년간 계속되었는데, 이때 당나라 기병군의 최선봉군이 바로 무령군이었다. 따라서 무령군에서는 뛰어난 무술을 지닌 병사를 필요로 했으며, 뛰어난 병사들이라면 그 병사가 이국인이건 죄인이건 심지어 해적이라도 상관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에 무예가 뛰어난 장보고는 곧 용병으로 당나라의 군대에 입대하였던 것이다.
우르릉 쾅.
쏟아지는 폭우 속에 뇌성이 일면서 번개가 번득였다가 순식간에 인근 가까운 해안가에 벼락이라도 떨어졌는지 온 지축이 흔들리면서 갑자기 불길이 솟아올랐다.
장보고는 하늘을 찢는 천둥소리 속에서 낯 익은 고함소리 하나가 벽력처럼 그의 귓가에 내리꽂는 것을 느꼈다.
"형님."
장보고는 순간 주위를 돌아보았다. 분명히 자신을 부르는 낯익은 목소리였다.
"누구냐."
장보고는 주위를 살펴보았다. 그러나 주위는 칠흑 같은 어둠과 사나운 폭풍우뿐이었다.
"누구냐고 내가 묻지 않더냐."
장보고는 소리를 질렀다.그러나 곧 장보고는 그것이 사람의 목소리가 아니라 하늘을 찢는 우레의 소리임을 깨달았다. 그러나 장보고에게 있어서는 분명히 낯익은 사람의 소리였다. 그렇다. 그 목소리는 정년(鄭年)의 목소리였다.
정년은 장보고와 신의를 맺었던 결의형제(結義兄弟)였다.
장보고와 정년은 똑같이 이곳 완도출신이었다. 당나라의 시인 두목(杜牧)이 지은 『번천문집』에는 정년이 장보고 보다 '10세 연하여서 장보고를 형으로 대우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정확하게 10세 연하라는 것은 불명이고 장보고보다 어쨌든 연하여서 장보고를 형이라고 불렀다는 것은 사실로 여겨진다.
두 사람은 어렸을 때부터 자연 이곳 조음도에서 물질하면서 자랐다.
두 사람은 태어난 곳은 각각 다르나 죽는 곳은 한날 한시에 함께 죽기로 약속하였으며, 그들이 의형제를 맺은 곳이 바로 이 성 안에서였다. 따라서 두 사람이 야망을 꿈꾸며 당나라로 건너간 것도 한날 한시였는데, 이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 시인 두목은 『번천문집』 제6권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신라사람인 장보고와 정년은 신라로부터 당의 서주(徐州)에 와서 군중소장이 되었다. 장보고는 30세이며, 정년은 그보다 10세 연하여서 장보고를 형으로 대우하였다. 두 사람은 싸움을 잘하여 말을 타고 창을 휘두르며 그들의 본국에서는 물론 서주에서도 당할 사람이 없었다. 정년은 바다 속 50리를 헤엄쳐 들어가도 조금도 숨이 가쁘지 않았고, 무예도 뛰어나 장보고도 그에 미치지 못하였다. 나이로는 장보고가 연상이었으나 무예는 정년이 위여서 항상 사이가 좋지 못하고, 서로 지려고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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