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장자키] '난장정신'과 김덕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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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53면

문을 연다. 이 문은 낯설고 설익은 길을 향한 것일 수도 있다. 나는 이 미지의 땅을 '난장(亂場)'으로 부르려 한다.

난장이란 무엇인가. 사전적인 의미로 난장은 옛날 부정기적으로 서던 장을 일컫는다.

그러나 이를 오늘날의 문화적인 은유로 보면, 잡스런 흥행거리들이 마구잡이로 얽히고 설켜 신명나게 노는 '열린마당'을 의미한다.

이 판에서는 예술(인)의 귀천도, 서양 근대성의 유물인 확고한 장르 예술의 구분도 없다. 오직 각종의 '짓거리'들이 질펀하게 떠도는 자유와 욕망의 해방구일 뿐이다.

난장(판). 나는 다소의 부정적인 편견이 담겨 있는 이 이미지를 오늘날 싱싱하게 꿈틀대는 언어로 멋드러지게 부활시킨 인물로 김덕수를 꼽는다. 그는 흔히 사물놀이의 '대부'로 불리는 쟁이다.

그는 '난장꾼' 남사당패 출신이다. 지금도 여전히 자신들을 '난장을 트는 사람들'로 여기며 그 무대에서 20여년 동안 신명의 울림을 내고 있다.

'난장의 예술'은 오늘의 김덕수(패)를 해독하는 키워드다. 사물놀이와 재즈가 만나고, 김덕수가 정명훈과 자연스레 어울리는 상생(相生)의 예술의 밑바탕에 '난장정신'이 면면히 흐르고 있다.

난장의 가장 큰 장점은 이런 유연성이다. 구속이 없으니 여기에서는 굳이 네것 내것을 따져 벽을 만들지 않는다. 서로 얽히고설키고 충돌하며 급기야는 혼융의 경지에까지 이른다.

이른바 크로스오버(crossover)와 퓨전(fusion)의 원형이 여기에 있다. 이 코너는 이런 현장과 예술(인), 현상의 면면들을 알리는 기수(jockey)가 되고자 한다. '자키'는 디스크.비디오 자키의 그것이요, 잡기(雜記)나 '(따라)잡기'의 애교있는 변형어로 봐주길 바란다.

요즘 유행어인 크로스오버와 퓨전은 오늘의 눈으로 보면 난장의 대표적인 구성양식이라 하겠다. 크로스오버는 '장르넘기''장르 가로지르기'다. 가야금으로 파헬벨의 '캐논'을 연주(혹은 변주)하고 거기서 제3종의 감흥을 끌어내는 것이다.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이를테면 바이올린으로 국악 산조(散調)를 연주하는데, 그 연주가 우리 음악의 유니크한 맛인 농현(弄絃)의 깊이까지 내는 경지라면 그것은 퓨전의 세계다. 퓨전은 이런 화학의 작동원리가 최고조로 발현될 때 예술로서의 성공까지 담보한다.

난장을 주도하는 사람(집단)들은 '예술독립군(인디)'일수도, 이미 일정하게 자기 영역을 확보한 기성 예술가들일 수도 있다.

장르의 출발선도 제 각각일 수 있다. 공간이나 민족도 초월할 수 있다. 건축이나 패션, 심지어 학문의 세계에서도 난장을 트는 일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퓨전건축.퓨전음식.퓨전패션 등은 이미 자주 쓰이는 용어가 아닌가.

어떤 숙성된 난장의 세계도, 아직은 설익은 난장의 세계도 좋다. 그런 마당으로 '작은' 발걸음을 내딛는다. 아주 가볍고 자유롭게.

정재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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