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헨 위기] 교포들 깨진 '이민의 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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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부에노스아이레스 중심가에서 30분 정도 떨어진 카라보보 거리에 서면 마치 한국의 어느 시골 읍내에 온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이곳에는 교민들이 운영하는 식당.약국.빵집.목욕탕.PC방 등 각종 가게는 물론 교회.절.예식장까지 없는 것이 없다.

한국과 다른 점은 어디나 할 것 없이 대낮에도 문을 꼭 잠가 둔다는 것이다.

손님이 와도 밖에서 초인종을 눌러야만 문을 열어준다.

언제 강도가 들이닥칠지 몰라 두렵기 때문이다.

이곳은 우범지대와 맞붙어 있어 치안이 불안한 편이다. 한인회에선 경찰 출신 현지인들을 일종의 청원경찰로 고용해 거의 하루 종일 순찰을 돌리고 있다.

이렇게 조심한 덕분에 지난해 말 반정부 시위가 폭동으로 변해 약탈행위가 벌어질 당시 이곳은 피해를 보지 않았다.

1990년대 중반에는 이곳도 장사가 잘돼 흥청망청하는 분위기였다고 한다.

그러나 최근에는 경기침체와 사회불안이 맞물리면서 분위기가 썰렁하기만 하다.

이민 1세들 상당수가 아르헨티나를 떠나고 싶어한다. 이들이 이 나라로 이민 온 가장 큰 목적 중 하나가 돈이었는데, 지금으로선 돈벌이할 기회가 별로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많은 교포가 옷장사를 하는데 연중 최대 대목인 연말 장사를 공쳤다고 울상이다.

수년 전부터 또다른 고향을 찾아 미국.멕시코 등으로 재이민을 떠나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 교민수는 한때 4만5천명에 달했으나 지금은 절반 이하인 2만명 정도로 줄었다.

이민 1.5세나 2세들의 심정은 훨씬 복잡하다. 이들에겐 청소년기를 보낸 아르헨티나가 고국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정치.경제.사회 등 모든 면에서 찌들 대로 찌든 이 나라에서 젊은 꿈을 펼칠 기회를 찾기가 쉽지 않다.

특히 실업률이 20%에 육박하는 현실에서 일자리를 구하기란 말 그대로 하늘의 별따기다.

한 교포 대학생은 "여기서 태어나고 자랐기 때문에 스스로는 아르헨티나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며 "이 나라를 떠날 생각은 없지만 요즘처럼 장래에 대해 불안을 느껴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한국에 대해선 "말을 잘 모르고 솔직히 별로 관심도 없다"고 털어놨다.

주정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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