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원 칼럼] 신세계질서 대응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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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어느새 21세기의 첫해가 다 지나갔다.

그 무슨 근거를 가지고 새 천년은 '화해와 협력'의 시대가 될 것이라고 했는지 모르지만 2l세기의 출발은 '화해와 협력'이 아닌 '전쟁의 해'로 기록되게 됐다. 지난해 9.11 참사는 냉전의 종식으로 장밋빛 환상에 빠져 있던 세계를 향해 항구한 평화는 아직 요원하다는 경종을 울렸다.

예상했던 대로 미국은 테러세력을 척결하기 위해 방대한 군사력을 동원했을 뿐만 아니라 국제사회의 반테러 연맹을 결성함으로써 세계질서에 변화를 가져오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냉전만 종식되면 긴장과 갈등은 저절로 사라진다고 믿는 것 같다. 그러나 국제사회에는 냉전 이전에도 긴장과 갈등이 있었고 냉전 이후에도 마찬가지다.

*** 19C 강대국 체제와 유사

오늘의 국제관계를 19세기 유럽의 '강대국의 협조체제(Concert of the Great Powers)'와 유사한 체제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상당히 설득력 있는 관점이다. '유럽 협조체제'라고도 불리는 강대국 협조체제는 나폴레옹 전쟁을 마무리하는 과정에서 강대국들이 협상과 타협을 통해 1815년 '빈질서'를 구축하고 변화를 요구하는 세력의 도전에 신축성 있게 대응해 나감으로써 기본질서의 골격을 거의 1세기 동안 유지할 수 있었던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작금의 국제관계도 강대국들의 '협조'를 통해 갈등을 관리해 나가는 경향이 강하다. 강대국들이 그만큼 외교적으로 성숙하다는 것을 말한다.

특히 미국과 유럽이 러시아를 신국제질서에 참여시키고 있는 것은 1815년 전승국들이 프랑스를 빈체제에 참여시킨 것과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관점에 따라서는 강대국들이 협조한다는 뜻에서 오늘의 국제질서를 '화해와 협조'의 체제라고 보는 사람도 있을 수 있지만 강대국이 아닌 우리로서는 다음과 같은 점을 유념하지 않으면 안된다.

우선 첫째로 '강대국의 협조체제'는 그야말로 강대국들이 지배하는 체제다.19세기 유럽협조체제도 자세히 보면 약소국들의 운명을 강대국들이 결정하고 약소국들은 이를 받아들이는 것을 볼 수 있다.

냉전체제 아래에서는 그나마 약소국들에는 일종의 선택이 있었다.동서 진영 중에 어느 한편을 선택하든가,비동맹을 선언할 수도 있었지만 강대국들의 협조체제 아래에서는 기존질서에 반대하는 세력은 테러를 통한 혁명 아니면 기존질서에 종속돼야 하는 양자택일의 골목길에 설 수 있다. 그런 경우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21세기가 던지는 가장 근본적인 도전이다.

둘째로 19세기의 유럽협조체제는 1백년 동안 유럽의 평화를 유지했다고 하지만 그것은 강대국간의 평화를 뜻하며 약소국들은 계속해 전쟁에 휘말렸다.

실제로 유럽의 협조체제는 전쟁을 방지하기 위한 체제가 아니라 전쟁을 관리하고 조정하기 위한 도구였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지금의 국제질서도 마찬가지다. 강대국들의 관계가 개선됐다고 약소국들간의 분쟁도 해소됐다고 볼 수는 없다.

셋째로 강대국들의 협조체제는 일종의 과두정체(oligarchy)적 성격이 있지만 그 중심에는 주도적 역할을 하는 강대국이 있다. 19세기에는 영국이, 21세기에는 미국이 바로 그와 같은 역할을 하는데 더욱이 미국은 영국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힘의 우위를 가지고 있다.

*** 외교력 발휘 공간 활용을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어떤 단순한 공식이나 슬로건으로 대답할 수 있는 성격의 문제가 아니다.가장 중요한 것은 현실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이다. 어떤 낭만적인 환상 또는 강대국에 대한 원망도 우리의 현실인식을 왜곡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강대국들이 주도하는 질서에 아무런 능동적 노력도 없이 무조건 반발과 종속의 극단으로만 치닫는 우는 범하지 말아야 한다. 제한된 가능성을 위해 강대국들을 내면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외교력을 발휘해야 한다.

결국 강대국들도 세계질서를 운영해 나가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보편타당한 원칙과 절차가 필요한 만큼 약소국들의 설득력 있는 외교를 위한 공간은 있게 마련이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러한 공간을 활용할 줄 아는 능력이다.

김경원 <사회과학원 원장. 고려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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