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부모 5년 만에 ‘백기’ 든 사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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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분당에 살던 사토(佐藤·39·가명)씨는 20일 아들·딸과 함께 일본으로 돌아갔다. 규슈(九州)의 친정집에서 아이들 공부를 시키겠다고 했다. 남편은 기러기 생활을 시작한다. 그는 1998년 미국에서 어학연수를 하다 한국인 남편을 만나 결혼했다. 2006년 큰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한국에 왔다. 5년간 한국의 학부모로 지냈다. 하지만 결국 백기를 들었다. 일본·미국의 교육시스템과 비교할 때 한국은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많았다. “일본도 경쟁이 심하지만, 한국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에요. 여기선 아이도 엄마도 불행할 것 같아 한국을 떠납니다.”

#극성 엄마

20일 일본으로 떠난 사토(가명·왼쪽)씨가 출국 전 서울 인사동 한 찻집에서 지인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얼굴 알려지는 게 부담스럽다”는 사토씨의 뜻에 따라 뒷모습을 촬영했다. [임미진 기자]

초등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아이를 축구 교실에 넣었다. “여기선 그거 안 하면 친구 못 사귄다”고들 했다. 남자 아이 10여 명이 토요일마다 모여 축구를 배웠다. “왜 운동을 돈 내고 할까?” 이해가 안 됐다. 운동은 겨우 한 시간 시키고, 햄버거·피자 같이 살찌는 간식을 먹이는 것도 이상했다. 더 이상한 건 매주 토요일 우르르 몰려다니는 엄마들이었다. “엄마들이 돌아가면서 한 명씩만 나와도 될 텐데, 싶었어요. 맞벌이 엄마들은 시간을 못 맞추니까 저절로 떨어져나가요…. 엄마들 사이에서 왕따가 돼요.”

자신도 차츰 모임에서 소외됐다. “아이들 축구하는 동안 엄마들은 학원 얘기, 선생님 얘기를 해요. 전 정보가 없으니까 엄마들이 좋아하지 않아요.”

엄마들의 친밀도가 아이들에게도 영향을 미치는 것을 많이 지켜봤다고 했다. "엄마가 친구 없으면 아이도 친구 없어요. 맞벌이 엄마 중에 전학간 사람도 몇명 있어요." 그는 "아이들이 엄마가 하는 걸 보고 배우는 것 같다"고 했다.

아이가 3학년이 되고 나서 그는 결국 축구 교실을 그만뒀다. 앞으론 아이들 생일 파티를 뷔페에서 하자는 엄마들끼리의 결정 때문이었다. “뷔페에서 생일을 하면 돈이 만만치 않잖아요….” 그는 “더 이상 엄마들에게 맞출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 반장 엄마

“엄마, 저 반장 됐어요!” 3학년 2학기가 시작된 어느 날, 아들은 상기된 얼굴로 뛰어들어왔다. 사토씨는 ‘이제야 아이가 한국에 적응하나 보다’ 생각했다.

사토씨도 바빠졌다. 일주일에 보통 2, 3일씩 학교에 불려갔다. 그때마다 어린 딸을 놀이방에 맡겼다. 환경 미화 주간, 대청소, 인사 교육 강조 기간…. 학교에선 때마다 "도와주시길 바랍니다" 라는 이메일를 보내왔다.

번번이 엄마들을 모아 나갔다. 그때마다 모인 엄마들에게 밥을 샀다. 환경 미화에 쓸 재료도 사토씨가 샀다. 가을 소풍 땐 선생님 도시락 때문에 밤잠을 설쳤다.

부반장 엄마는 “원래 반장 엄마는 그렇게 하는 거다. 싫으면 애 반장 안 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내가 반장시킨 게 아니라 아이들이 뽑은 거 아닌가요?” 그는 결국 아이에게 “앞으론 반장하지 마라”고 당부했다고 했다.

#외로운 아이

아이는 함께 놀 친구가 없었다. 반 친구들은 학교를 마치기 무섭게 학원을 돌았다. 또래 아이 집에 놀러 가도, 아이는 학원에 가 없고 엄마만 있었다.

학교에서도 친구를 제대로 못 사귀었다. 학교를 오가다 이유를 짐작할 뿐이었다. “쉬는 시간엔 ‘가만히 앉아있고 화장실만 다녀와’라고 하더군요. 급식 시간에도 밥을 타오기 전까지 머리에 손을 올리고 앉아 있고요.” 그는 “함께 뛰어놀 시간이 전혀 없는데, 어떻게 친구를 사귀느냐”고 했다.

아이가 중·고등학교에 가는 것도 두려웠다. 이미 초등학교 저학년 때부터 학원·과외에 매달리는 엄마들을 봐 왔다. 이런 사교육 경쟁에 뛰어들 자신이 없었다.

한국 엄마들은 공부 외엔 가르치지 않는 것 같다고도 했다. 사토씨는 “축구 교실에서 종이컵을 바닥에 버리고, 서로 햄버거를 달라고 소리 지르는 아이들을 보며 놀랐다”며 “정말 중요한 교육이 무엇인지 잊어버리게 될 것 같았다”고 말했다.

글, 사진=임미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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