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을 열며] 족쇄가 된 '월드컵 16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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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당신은 어느 편입니까.

'열번 찍어 안넘어가는 나무 없다'입니까, 아니면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라'입니까. 저는 월드컵에 관한 한 하루에도 몇번씩 오락가락합니다. 특히 '16강'얘기만 나오면 머리가 지끈지끈합니다. 요즘 고민은 '어떻게 하면 16강 얘기를 빼고 월드컵 기사를 쓸 수 있을까'입니다.

*** 한국 골득실차로 조2위?

그런데 16강 얘기를 빼면 마치 팥 없는 붕어빵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은 왜일까요. 어느 새 16강에 중독됐다고 봐야지요. 주변사람들을 만나도 한결같은 질문이 "한국이 16강에 진출할 수 있느냐"입니다. 과연 한국의 16강 진출은 아홉번쯤 찍힌 나무일까요, 아직 오르지 못할 나무일까요.

이제는 신문.방송.잡지들에서 온통 '16강 시나리오'가 한창입니다. 가장 많이 등장하는 시나리오가 '1승1무1패로 16강에 진출한다'입니다. 즉 폴란드와 비기고, 미국에는 이기고, 포르투갈에는 지지만 골득실차로 조 2위가 된다는 것이지요. 그동안 워낙 '경우의 수'에 관한 한 '도사'들이 돼서 이 정도 계산은 아주 쉽게 나오는 모양입니다.

월드컵의 해가 밝았습니다. 5개월도 채 남지 않았지만 뒤집어 보면 아직도 1백40일이 넘게 남았습니다. 지금 추세로 가면 월드컵이 개막하기도 전에 이미 한국의 16강 진출이 기정사실이 돼 버릴 것 같습니다.

만약 16강 진출이 좌절된다면 또 '희생양'을 찾아야겠지요. 4년 전에는 감독과 언론이 책임을 져야 했습니다. 이제 다시 한번 차분하게 따져봅시다. 한국은 지금까지 다섯차례 월드컵에 진출해서 아직 단 1승도 거두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목표는 1승이 아니라 16강 진출입니다.

한 여론조사에서는 '폴란드에 이긴다'는 응답이 44.4%, '미국을 이긴다'는 무려 72%가 나왔습니다. 과연 객관적인 전력과 변수를 따져서 이런 대답이 나왔을까요. 그건 아닐 겁니다. 16강 진출이라는 목표를 먼저 정해놓고 거기에 맞추려면 이 정도 성적을 거둬야 한다는 '당위성'과 '희망사항'이 강하게 작용했겠지요.

그러면 폴란드와 미국에서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요. 폴란드 통신원이 보내온 현지소식에 따르면 폴란드는 조 추첨에서 D조에 속한 때부터 이미 16강 진출을 당연시하고 있다는 겁니다. 한국과 같은 조에 드는 '행운'을 잡았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떡 줄 사람은 생각지도 않는데 김칫국부터 마신다'고 해야 하나요.

미국은 어떻습니까. 세 팀 중에서는 가장 만만한 데다 지난해 말 서귀포에서 1-0으로 이긴 후로 미국은 당연한 한국의 '1승 제물'이 돼버렸습니다. 또 다른 여론조사에서 '한국이 1승도 못 거둔다'는 의견은 단 4.7%였습니다. 이 정도니 만약 한국이 미국을 이기지 못하면 난리가 나겠지요.

좋습니다. 예상대로 1승1무1패를 했다고 칩시다. 그러면 16강 진출이 가능합니까. 한국은 지난해 컨페더레이션스컵과 2년 전 시드니올림픽에서 모두 2승1패를 하고도 예선탈락한 경험이 있습니다.

즉 1승1무1패가 16강 진출의 필요충분 조건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현실적으로 최대한 가능한 성적이 1승1무1패인데 16강에는 올라야 하니까 거꾸로 목표에 '경우의 수'를 맞춘 것이지요.

*** 결과만큼이나 과정도 중요

목표는 있어야 합니다. 희망은 소중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목표가 족쇄가 돼 버린다면 차라리 없느니만 못합니다. 우리는 스페인과 2-2로 비겼을 때도, 독일에 2-3으로 졌을 때도 박수를 보냈습니다.

그것은 목표달성과는 상관 없이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최선을 다한 선수들에 대한 박수였습니다. 결과만큼이나 과정을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한국은 월드컵 개최국입니다. 일본과 공동개최이긴 하지만 아시아에서 처음으로 월드컵을 치르는 국가입니다.

목표를 향해 땀을 흘리는 선수들, 월드컵 조직위와 10개 개최도시 관계자들, 그리고 자원봉사자들 모두에게 박수를 보낼 준비를 합시다.

손장환 <체육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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