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 시평] 은밀한 반시장(反市場) 혁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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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지난해 9월 11일 미국 뉴욕의 세계무역센터 빌딩 폭파와, 12월 27일 한국 수원 법정의 삼성전자 전.현직 임원 9명에 대한 9백77억원 배상판결은 근본적으로 동일하다고 나는 판단한다. 둘 다 시장경제와 자유주의의 우등생에 대한 외부로부터의 침공.파괴였다는 점에서 말이다.

*** 9.11테러와 자유주의

그러나 크게 다른 점도 있다. 미국 쪽은 대통령과 사법기관.군인들이 총동원돼 테러범과 그 비호자들을 잡아 정의(正義)의 심판대에 세우겠다고 벼르고 있다. 한국의 법정은 이와는 반대 방향을 선택했다. 위에서 말한 판결에 이른 방향 말이다.

이 판결을 계기로 한국에서는 법원에 의한 반(反)자유기업적 '재판경제' 시대가 새로 열렸다. 은밀하게 반시장(反市場)혁명이 완성된 것이다. 이런 사후적 재판경제는 스탈린의 사전적 계획경제에 대칭될 만하다. 만일 이 방향으로 내처 간다면 궁극적으로 한국에서 자유시장 제도와 시장의 자생적 질서는 질식에 이를 것이다.

이 판결에는 9백77억원의 배상이 '회사와 주주의 이익을 지켜야 하는 이사로서의 임무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은 점이 인정돼' 내려진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 재판은 주인(회사와 주주)의 이익을 지키는 경영 책임, 즉 회사와 주주의 이익 지키기라는 시장 활동의 승패를 문제삼은 민사재판이었다.

승패는 병가지상사(兵家之常事)라는 말이 있다. 한 전쟁의 승패는 여러 대소 전투의 승패의 합산이다. 한 나라의 존망은 여러 전쟁의 승패의 합산이다. 경영의 승패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삼성전자는 그 장래는 모르나 적어도 지금은 경영에서 최고의 승리를 거두고 있는 회사다.

이 재판이 판결한 이천전기㈜ 인수에 관련된 투자실패는 한 전투의 패배에 불과하다. 그 패배를 현재적(顯在的) 및 잠재적 주주들의 주식시장은 철저하게 주가에 반영하고 있다. 이른바 효율시장 이론에 의하면 노태우 대통령에게 준 헌금도, 삼성종합화학㈜ 주식의 처분에 따른 삼성전자의 가정(假定)된 손실도 주식시장은 모두 채점에 넣어 이 회사의 주가가 형성됐다고 본다.

그 반영 결과인 삼성전자의 주가는 시장에서 가장 비싼 주식에 속한다. 주된 생산품인 반도체 가격이 10분의1로 떨어졌음에도 말이다.

이것은 이 재판의 판결과는 반대로 이 회사의 이사들이 주인의 이익을 지키는 임무를 제대로가 아니라 그 이상으로 이행했음을 증명한다. 주가 이외에 회사 경영의 승패를 보여주는 다른 눈금은 없다. 높은 주가는 주인인 주주가 경영자에게 주는 우등상장이다.

이런 반증(反證)에 대항하려고 참여연대 쪽은 "이번 판결은 경영결과에 대한 책임을 물은 것이 아니라 경영 의사결정 과정의 부적법성과 불충분성에 대한 책임을 물은 것"이라고 말한다. 이들은 다른 주주가 시장을 통해 이 회사 경영진에게 수여한 상장을 찢으려고 하는 것이다. 경영 의사결정 과정의 부적법성이란 것은 그것이 형사상의 범죄가 아닌 한 부실한 회사만을 대상으로 삼아야 말이라도 된다.

회사의 경영체제나 의사결정 과정은 회사마다 다르고 나라마다 다르다. 사업 분야별로 전문 담당 이사가 있을 수도 있고 그 밑에 전문 부서도 있을 수 있다. 이사회는 이런 전문부서의 성실성과 전문성을 철저히 신뢰할 수 있다. 좋은 조직일수록 그렇다. 그리고 이사회 상정에 앞서 안건의 토의와 처리 과정을 미리 잘 알고 있을 수 있다. 그래서 이사회의 공식적 처리 과정은 아주 간단할 수 있다.

*** 경영 재판권 누가 가지나

삼성전자의 이사들에게 경영책임을 묻는 것은 임진왜란 때 충무공을 감옥에 집어 넣은 것과 비슷하다. 경영상의 의사결정 과정만을 흠잡아 거액을 배상시키는 것은 최우등생에게 공부하는 방법을 흠잡아 낙제를 주고 거기다가 체벌을 주는 것과 똑같다. 아니면 교활한 순 억지다.

경영에 관한 재판권은 그것이 범죄가 아닌 한 시장이 가진다. 법원이 꼭 개입할 처지라면 법원도 시장의 결과를 준용하는 수밖에 없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시장에 관한 일을 시장보다 법률이나 판사의 이성과 양심이 더 잘 판단한다고 믿는 지적(知的) 교활과 오만에 대해 상급 재판과 우리나라 시장경제 전체가 어떤 시간을 두고 어떻게 반응할지는 두고 볼 일이다.

姜偉錫(월간 에머지새천년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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