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이윤기씨의 신화 속 말 이야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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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소설가 최수철의 작품에 『말(馬)처럼 뛰는 말(言)』이 있거니와, 말은 '뛰다'라는 동사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짐승이다.

'뛰기'에는 두 가지가 있다. '쾌주'와 '도약'이 그것이다.

말은, 잔등에 탄 인간에게 쾌주와 도약의 경험을 가능하게 한 거의 유일한 짐승이다. 하지만 이 짐승에 대한 인간의 요구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쾌주(수평 이동)와 도약(수직 이동)을 가능하게 한 이 짐승을 통하여 인간은 비상(차원 이동)을 꿈꾼다. 신화에는 그 꿈이 이렇게 그려져 있다.우리 신화책 『삼국유사』는 중국 삼황오제(三皇五帝) 신화를 이렇게 시작하고 있다.

"제왕이 마침내 일어날 때는 반드시, 부명(符命)을 얻고, 도록(圖錄)을 받게 되어 여느 사람과 다른 데가 반드시 있는 법이다. 그래서 하수(河水)에서는 하도(河圖), 즉 용마(龍馬)의 등에 그려진 그림이 나왔고, 낙수(洛水)에서는 낙서(洛書), 즉 신기하고 이상한 거북의 등에 씌어진 글이 나옴으로써 성인이 일어났던 것이다."

'용마(龍馬)'의 등에 그려진 그림(팔괘) 이라는 표현이 우리 시선을 확 잡아당긴다. 용마는 하늘을 나는 용, 하늘을 나는 말의 모습과 능력을 아우르는 천마(天馬)다. 이 천마의 하강을 통한 예고, 그것이 바로 성인 태호복희씨의 천손하강(天孫下降)이다.

『삼국유사』는 박혁거세 탄생 신화를 이렇게 전하고 있다.

"진한 땅에는 옛날에 여섯 마을이 있었다… 기원전 69년 3월 초하루 6부 촌장들이 각각 자제들을 데리고 다 함께 알천 둑에 모여 의논했다. '우리들이 위로 백성 다스릴 만한 임금을 가지지 못하고 있어 백성들이 모두 방종하여 제멋대로 놀고 있으니 덕이 있는 사람을 찾아내어 임금으로 삼아 나라를 창건하고 도읍을 정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제서야 모두 높은 곳에 올라가 남쪽을 바라보니 양산 밑 '나정'곁에 이상한 기운이 번개처럼 땅에 드리우더니 웬 흰말 한 마리가 무릎을 꿇고 절하는 시늉을 하고 있었다. 6부 촌장들이 달려가 살펴보니 보랏빛 알 한개가 놓여 있었다. 말은 사람들을 보자 울음소리를 길게 뽑으면서 하늘로 올라갔다. 알을 쪼개니 형용이 단정하고 아름다운 사내아이가 있었다. 놀랍고도 이상하여 아이를 동천에서 씻기자, 아이 몸에서 광채가 나고 새와 짐승들이 춤을 추어 천지를 진동케 하고 해와 달이 맑고 밝았다. 그래서 이름을 '혁거세왕'이라 하고 왕위의 칭호는 '거슬한'이라고 했다."

경부고속도로를 통해 경주로 들어가면 탑정동 초입에 오릉이 나온다. 오릉으로 들어가지 말고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어 야트막한 구릉을 오르면 조그만 사당이 있다. 나정이다. 아득한 옛날에는 우물 자리였다고 하지만 지금은 언제 우물이 있었나 싶게 황량하다.

나정은 신라정이라고도 불린다. 신라정이라면 '나정(羅井)'이어야 할 터인데도 어찌된 일인지 지금까지도 '나정(蘿井)'으로 불린다. '나(蘿)'는 댕댕이 덩굴.담쟁이 덩굴을 뜻하는 글자다. 다른 나무의 몸통을 감고 하늘을 향해 기어오르는 식물이다.

신화에 따르면, 이 샘가에는 "흰말 한 마리가 무릎을 꿇고 절하는 시늉을 하고 있었"고 말 앞에는 "보랏빛 알 한개가 놓여 있었으며, 사람들을 보자 말은 울음소리를 길게 뽑으면서 하늘로 올라갔다." 하늘로 날아올라간 말은 천마(天馬)다. 바로 이 천마의 천계 상승으로 예고되는 것, 그것이 바로 혁거세의 천손하강이다.

이 대목에서 나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날개 달린, 따라서 하늘 날기를 자유자재로 하는 천마 페가소스를 연상하지 않을 수 없다. 페가소스는, 영웅 벨레로폰으로 하여금 불뿜는 괴물 키마이라를 죽이는데 결정적인 공로를 세운 천마다.

우리 신화에 등장하는 말의 샘, 하얀 말이 무릎을 꿇고 있는 샘…… 이 대목에 이르면 나는 페가소스의 이름을 파자 풀이하고 싶다는 유혹을 견딜 수 없어진다. '페가소스'라는 이름은, '샘'을 뜻하는 고대 그리스 말 '페게'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페가소스가 발길질로 판 것으로 전해지는 샘은 '히포크레네'라고 불린다.

'말의 샘'이라는 뜻이다. 히포크레네는 예술의 여신들, 즉 무사이(뮤즈들)의 본거지인 헬리콘 산꼭대기에 있다. 물이 어찌나 맑은지, 독사들이 마시면 독니가 삭아 없어진다는 샘이 히포크레네다.

히포크레네는 예술가들에게 영감의 원천(源泉)이기도 하다. 말은 이렇게 심원하게 상징적인 동물이다. 경주에는, 하늘과 땅과, 예술적 영감을 아우르는 우리의 '히포크레네(말의 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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