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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입지 좁힌 ' LA발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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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11월 하순 칠레에서 있었던 한.미 정상회담 결과에 노무현 대통령이 대만족했다고 외교 당국자들이 전하고 있다.

한국 정부는 문제의 로스앤젤레스(LA) 연설이 치밀한 사전준비를 거친 것이며, 평화적.외교적으로 핵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한국의 입장에 부시 대통령의 동의를 얻어내는 성과를 거두었다고 자화자찬하고 있다. 하지만 필자는 LA연설이 한.미 관계에 미칠 부정적인 영향을 우려해야 할 것이라고 본다.

필자가 직접 만난 미국 관리 및 한반도 전문가들은 LA연설에 나타난 노 대통령의 인식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대통령이 피력한 인식은 미국 대다수의 국민이 공유하는 북핵의 위험에 대한 미국 정부의 인식과 근본적으로 상이하고 큰 괴리가 있기 때문이다. 연설에서 나타난 대통령의 가치관이나 정치이념은 차치하더라도 사실관계의 오류, 예컨대 제2차 핵위기의 본질과 위기발생 경위에 대한 인식 부족을 시사하는 발언내용은 이해하기 곤란하다는 것이다.

최고지도자가 북핵문제에 대한 인식을 직설적인 말로 공개 표명한 것은 획기적인 사건이다. 그런 행위는 위험부담을 수반한다. 미국에서 대북정책이 논의될 때 한국 정부의 입장을 존중할 필요성을 약화시켜 한국 배제론에 힘을 실어주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또 지금까지 단편적으로 미국에 전달된 한국 정부의 인식이 청와대 특정 참모들의 것이지 대통령 자신의 신념은 아닐 것이라고 노 대통령을 옹호해온 인사들의 주장이 설득력을 잃게 됐다.

더 심각한 것은 노 대통령이 그런 연설을 하게 된 동기에 대한 미국 정부 안팎의 전문가들의 견해다. 문제의 연설은 부시 행정부의 대북 강경화를 우려한 것이라기보다는 김정일 위원장을 향한 것이라는 분석이 있다. 남북 정상회담을 겨냥한 사전 포석이라는 해석에 무게를 두고 있다는 것이다. 만약 이러한 판단을 미국 정부가 굳히게 된다면 한.미 공조와 협력관계의 기반이 흔들리게 될 것이다. 미국 사회 전반에 한국 정부에 대한 불신감을 심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것에 대한 대책 강구가 필요한 시점이다.

한국 정부가 미국의 대북정책에 영향력을 행사해 한국 국익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전환시키기를 원한다면 그에 앞서 허물어져 가는 한.미 양국 간의 신뢰를 재구축하는 일이 필요하다는 것은 외교사가 입증하는 교훈이다. 한국이 표방하는 핵문제 해결에 있어 주도적 혹은 적극적 역할을 가능케 하는 기반 조성은 현재의 한국 정부 정책으로는 곤란할 것이다.

또 노 대통령 연설에는 제2기 부시 행정부가 극단의 강경정책으로 선회하리라는 인식이 전제로 깔려 있다. 온건파가 사라지고 소위 네오콘들의 비중이 커지는 것도 그러한 우려를 증폭시키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미국의 대북정책이 정책 결정자들의 성향만으로 결정된다고 보는 것은 너무 단편적이다. 국제적.국내적 여러 요인이 부시 정권의 대북정책에 제약요소로 작용할 것이다. 아프가니스탄 전쟁.이라크 전쟁의 후유증, 그리고 제2기 부시 정권에서 성취를 기획하고 있는 국내과제 등을 생각하면 북핵 문제의 평화적.외교적 해결을 염불같이 외는 부시 대통령의 말을 수사학적 발언에 불과하다고 단정짓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목이 마르도록 미국과 이중창을 하기를 갈망하고 있다고 한다. 앞으로 6자 및 양자 협의 과정에서 김 위원장이 대범한 결단을 내릴 경우까지 상정한다면 그것은 미국의 대북정책에 유연성을 높이는 요인이 될 것이다. 노 대통령의 확고한 신념대로 북한이 핵을 포기할 것이라면 미국이 강압정책으로 선회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한국 정부의 시급한 과제는 미국이 강압적 정책을 선택하지 않고도 문제 해결이 가능하도록 창조적이고 현실적인 방향으로 한국 정부 자신의 정책을 재정립하는 것이다.

김영진 조지워싱턴대 명예교수 전 아시아문제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