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산은 산 물은 물 (115)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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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115. 사진집

법문집과 함께 빠뜨려선 안되는 중요한 기록이 성철 스님 사진집이다. 법문집을 만들면서 '사진집도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1980년대 말 어느날, 해인사에서 나오는 월간 『해인』을 만드는 편집실에 들렀다. 처음 보는 사람이 있어 일단 목례부터 했다.

편집장 스님이 "서울에서 내려온 분이신데 해인지 표지 사진 때문에 의논하고 있었다"고 한다. 사진작가 주명덕씨였다. 이런저런 얘기 끝에 내가 주씨에게 부탁했다.

"안그래도 성철 스님 사진집을 만들어야겠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오늘 이렇게 뵈온 김에 큰스님 사진집 만드는 것을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초면의 실례를 무릅쓰고 부탁했는데, 주씨가 "먼저 큰스님께서 허락하셔야 될 일이지요"라고 대답했다. 그렇겠다 싶은 생각이 들면서, '큰스님께 무슨 말씀을 드려야 사진을 찍으려 할까'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일단 다음날 아침 주씨가 백련암에 들러 암자도 구경하고 큰스님께 인사도 하기로 했다.

다음날 아침 성철 스님을 뵙고 사진집 얘기를 직접 말하지 않고 주씨의 면담을 허락해줄 것을 먼저 청했다.

"제대로 된 큰스님 사진이 한 장도 없는데, 오늘 마침 훌륭한 사진작가가 오기로 했으니 한번 만나 주십시오."

예상했던 대로 성철 스님은 퉁명스럽고 무심한 목소리로 거절했다.

"사진을 찍어 뭐할라꼬, 니나 찍어라."

오전 10시쯤 주씨가 올라왔는데, 제대로 된 사진기는 가져오지 않고 폴라로이드 카메라만 달랑 들고 왔다. 속으로 서운한 생각이 들었다. 조금 있으니까 큰스님이 마당으로 포행을 나왔다. 다시 보고했다.

"아침에 말씀드린 그 사진작가가 왔습니다."

성철 스님이 주씨를 보더니 예의 그 퉁명스런 목소리로 "사진기도 안 가지고 다니는 사진사도 있나"고 되물었다. 성철 스님 얘기를 이미 많이 들어 알고 있던 주씨가 나서 직접 말했다.

"처음 뵙는데 어떻게 큰 사진기를 들고 올 수 있겠습니까. 이 간단한 사진기로 즉석 사진을 올릴 테니 한번 봐 주십시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주씨가 포즈를 취할 것도 없이 즉석에서 폴라로이드 사진기의 셔터를 눌렀다. 곧바로 인화지가 술술 빠져 나오면서 사진 한 장이 완성됐다. 사진을 큰스님에게 보였다. 성철 스님은 사진보다 즉석 카메라인 폴라로이드 사진기에 훨씬 더 관심이 가는 듯 주씨에게 이런 저런 질문을 했다. 그러다보니 금방 친해져 다음에 만나 사진을 찍기로 약속까지 했다.

성철 스님은 또 나에게 "얼른 가서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한 대 사오라"고 성화를 부리기도 했다. 주씨와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같이 산을 내려와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한 대 구했다. 성철 스님은 이후 꼬마들이 암자에 찾아오기만 하면 직접 찍어 한장씩 나누어주었다.

그런데 성철 스님은 "사진을 찍자"고 약속을 하고서도 주선생이 카메라 가방을 지고 올라오면 이 핑계 저 핑계로 카메라 앞에 서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허탕치는 날도 있었지만 주씨는 열심히 백련암을 오르내리며 큰스님의 모습을 담았다. 그리고 1988년 성철 스님의 옛날 사진과 수행했던 절의 사진까지 모아 『포영집(泡影集)』이라는 사진집을 출간했다.

그런데 출판비가 많이 들어 팔리든 안팔리든 정가(8만원)를 붙여서 내놓았더니 절집에서 난리가 났다. 다른 스님들은 물론이고 일부 사형.사제들도 "큰스님 얼굴 팔아 장사하는 나쁜 놈"이라고 어찌나 욕을 해대는지 정말 죽을 맛이었다.

어차피 팔릴 책도 아니었고, 실제로 법보시(경전 같은 불교관련 책을 무료로 제공하는 것)로 그냥 다 나가는데 괜히 정가를 붙여 욕을 먹는다는 생각에 후회가 막급했다. 그러고 얼마 지난 뒤 가산 큰스님에게 『포영집』 한권을 기증하러 간 자리였다. 사진집 만들고 어찌나 욕을 먹는지 죽을 맛이라고 했더니 큰스님이 위로의 말을 해주었다.

"지금은 욕하겠지만 성철 스님 계시지 않을 때는 이 포영집이 금덩어리가 될 텐데 뭘 그리 걱정하느냐."

따뜻한 격려는 큰 힘이 되었다. 실제로 이 글을 연재하는 과정에서 주씨의 사진은 정말 금덩어리처럼 긴요하게 쓰이고 있다.

원택 <성철스님 상좌>

정리=오병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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