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부산 국제영화제 심사위원 윤정희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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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9면

"파리에 살면서 하루에 서너 편씩 영화를 본 적도 많아요. 안 본 영화가 거의 없었죠." 그는 잉그마르 베리만.프리츠 랑을 비롯해 당시 열렬히 빠졌던 명감독들의 이름을 줄줄이 꿰었다. 그런 만큼 그가 최근의 한국 영화를 보는 시선은 예리하고 객관적이다.

"한국영화가 활기를 띤다고 해서 큰 기대를 갖고 있지만 솔직히 기대만큼 흡족한 작품은 아직 많지 않아요. 괜히 겉멋만 부리고 관객을 속이는 영화들이 적지 않아 보여요."

그는 장삿속이 뻔한 영화, 특히 섹스로 철학하는 척하며 관객을 현혹하는 영화를 경멸했다. 자기 이름에 책임을 져야 할 감독들까지 이런 행태에 가담하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플 때가 많단다.

"감독은 낭비를 하지 말아야 합니다. 멋쟁이인 척, 뭔가 생각이 많은 척하지만 내용은 없고 겉만 요란한 영화는 당장은 몰라도 오래지 않아 본색이 드러납니다. 그런 면에서 작품에 비해 과대평가받고 있는 감독도 있는 것 같아요."

그러나 "한국영화가 잘 될 것"이라는 낙관적인 전망을 거두지 않았다. 특히 젊은 감독들을 적극 밀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홍상수 감독은 자신만의 영화언어가 있어요. 큰 감독이 될 걸로 봐요. '8월의 크리스마스'의 허진호 감독과 '미술관 옆 동물원'의 이정향 감독도 장래가 밝고요. 아 참, '플란더스의 개'만든 감독이 누구죠? 봉준호씨요? 그 감독 다음 작품 너무너무 기다려져요."

선배이다 보니 대화는 자연히 현재 활동 중인 여배우 쪽으로 옮겨 갔다. "요즘 여배우들 개성이 없어요. 어떨 땐 너무 비슷해 헷갈릴 정도예요."

그러다 심은하씨 이야기가 나오자 목소리가 갑자기 높아졌다. '결혼소동'이후 은퇴설이 나도는 상황을 익히 알고 있었다. "무척 아까운 배우예요. 누군가 나서서 다시 활동을 할 수 있도록 이끌어줘야 하는데…. 주변에 그런 역할을 할 사람이 없나 보죠?" 목소리가 점점 안타까움이 가득한 톤으로 변해갔다.

"지금 심은하씨 심정 이해해요. 만사가 귀찮고 영화도 하기 싫을 거예요. 나도 한때 괴상한 루머에 시달린 적 있었잖아요? 그러나 지나고나서 생각해 보니 그 때 버티고 계속 연기 생활한 건 잘한 선택이었어요. 심씨처럼 재능있는 여배우는 반드시 연기를 계속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한국영화계를 위해서도 말이죠."

"저라도 나서 볼까요?" 웃음이 실린 농담투였지만 후배에 대한 애정이 절절했다.

"참 전도연씨 얘기 안 할 수 없죠. 그 배우 정말 끼가 철철 넘쳐요. '접속'에서의 얼굴과 '내 마음의 풍금' '해피엔드'의 모습이 어떻게 그렇게 각각 다를 수 있어요. 와아 놀라워요."

윤씨는 아직도 연기를 향한 열정으로 뜨겁다.

"배우란 타인 속으로 들어가 그 인간을 해석하는 직업입니다. 작곡가나 소설가처럼 하나의 세계를 만드는 예술가라고 할 수 있죠. 그 매력은 안 해 본 사람은 몰라요."

95년 '만부방'이후 스크린 나들이를 못한 그는 다음에는 자신이 출연한 영화로 영화제를 찾고 싶어했다. 그에게 누가 날개를 달아 줄 것인가.

글=이영기 기자, 사진=변선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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