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을 열며] 파르미나, 부디 살아 있으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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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퇴근길에 가끔씩 들르는 과천의 허름한 선술집 벽에는 낯익은 흑백사진 하나가 걸려 있다. 오가는 인파 속에서 진한 입맞춤을 하고 있는 젊은 연인에게 카메라의 앵글이 맞춰져 있다.

쓰러질 듯 젖혀진 여인의 허리를 감싸안은 청년의 단단한 팔과 빈틈 없이 포갠 입술, 바쁘게 걸어가는 행인들의 무관심한 표정에서 전쟁의 상처를 딛고 일어선 파리의 생동하는 분위기가 잡힐 듯 다가온다. '베제 드 로텔 드 빌'(파리시청에서의 키스)로 유명한 그 사진이다.

*** 스토리가 담긴 현장 사진

1950년 이 사진을 찍은 프랑스 사진작가 로베르 드와노는 평생 35만장의 사진을 찍었다. '덧없음의 사냥꾼'이란 별명이 말해주듯 드와노는 흔적 없이 스쳐지나가는 것 같은 일상에서 역사와 인생의 의미를 포착해 냄으로써 20세기 보도사진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동시대에 활약한 프랑스의 보도사진작가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과 더불어 드와노는 결정적 순간에 '자기 눈의 연장(延長)'인 라이카 카메라로 포착한 마음의 상(像)을 통해 사건과 에피소드의 단면을 예리하게 파헤쳤다.

이제는 '이발소 그림'급으로 전락한 그 선술집 사진이 드와노가 남긴 수많은 사진 중 유일하게 배우를 동원해 찍은 연출사진이라는 점은 아이러니다.

말이나 글로는 도저히 표현하기 어려운 진실을 한장의 사진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은 감동이다. 베트남전의 참혹함을 보여주는 데는 네이팜탄을 피해 울부짖으며 달아나는 벌거벗은 소녀의 사진 한 장이면 충분하다.

무너져 내린 월드 트레이드 센터가 뿜어낸 분진(粉塵)을 뒤집어쓴 뉴욕시민들의 조각상같은 사진 한장에 9.11테러의 비극성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사진기자가 찍은 한장의 사진에는 에피소드와 스토리가 있고, 인생이 있고 역사가 있다. 역사는 사진으로 남는다.

전쟁은 수없이 많은 사진을 낳는다.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공격이 한달을 넘기면서 하루에도 수백장의 사진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다. 그 중 어느 것을 골라 신문에 실을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은 편집기자의 몫이지만 국제부 기자들의 고민이기도 하다. 취재를 하고 기사를 쓸 때와 마찬가지로 그 선택의 기준은 '따뜻한 시선'과 '차가운 머리'라고 나는 믿는다.

며칠 전 신문에는 일곱살짜리 아프가니스탄 소녀 파르미나의 사진이 실렸다.(본지 11월 5일자 8면) 미군기가 투하한 폭탄의 파편에 온통 얼굴을 다친 파르미나가 두눈을 동그랗게 뜨고 겁먹은 표정을 짓고 있다. 파르미나는 오빠와 함께 집 앞에서 뛰어놀다 폭탄이 터져 공중으로 치솟아 올랐고, 오빠는 오른쪽 다리를 잃었다고 한다.

전쟁에서 민간인의 희생은 불가피하다. 9.11 테러로 희생된 무고한 인명이 소중한 만큼 아프가니스탄 주민의 목숨도 소중하다고 입버릇처럼 말은 하지만 폭탄에서 이성을 기대할 수는 없다. 아무리 정교하게 공격한다 하더라도 오폭은 있게 마련이다.

무고하게 피해를 본 사람의 눈에 전쟁은 또 다른 폭력으로 비칠 수밖에 없다. 폭력은 증오를 낳고,증오는 복수심을 낳는다. 세상 모른 채 부모의 사랑을 받으며 한창 뛰어놀 일곱살 어린애의 머리 위로 폭탄을 퍼붓는 미국을 파르미나는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평생동안 지워지지 않을 그 상처는 또 어찌할 것인가.

*** 전쟁은 또다른 폭력 불러

국가권력에 전쟁은 정의를 실현하는 수단이지만 개인에게 전쟁은 비극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일단 전쟁이 시작되면 명분은 사라지고 오로지 승리가 정의를 대신할 뿐이다. 깨끗한 전쟁은 없다. 그 어떤 숭고한 명분으로 치장한 전쟁도 시간이 지나면 추해지게 마련이다. 오사마 빈 라덴이 주장하는 성전(聖戰)도 한낱 허구에 불과할 뿐이다.

파르미나여, 부디 살아 있으라. 원한도 증오도 복수심도 인간의 부질없는 미망(迷妄)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을 그때까지는 적어도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배명복 국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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