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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지식인 공동성명 이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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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5월 10일의 한·일 지식인 공동성명도 그러하다. 양국 지식인 214명(한국 109명, 일본 105명)이 100년 전 한·일병합의 원천무효를 선언했다. 도쿄와 서울에서 동시에 발표됐다.

한·일 지식인 공동성명은 세계사적으로도 유례를 찾기 힘들다. 예컨대 핵무기 반대를 위해 여러 나라 지식인이 세계적 차원에서 공동선언을 하는 일과 구별된다. 한 국가 내에서 민주화·인권을 위해 한목소리를 내는 경우와도 차원이 다르다. 이번 공동성명은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국가와 국가의 대표적 지식인들이 한목소리를 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 한·일 관계는 물론 동북아와 세계 평화의 전범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 어떻게 하느냐에 달렸다.

이번 성명은 두 나라 사이에 ‘역사 정의’가 있음을 일깨웠다. 공동성명에는 “조약의 전문(前文)도 거짓이고 본문도 거짓이다. 조약 체결의 절차와 형식에도 중대한 결점과 결함이 보이고 있다. 한국 병합에 이른 과정이 불의부당하듯이 한국병합조약도 불의부당하다”는 표현이 있다. 지난 3월 막을 내린 제2기 한·일역사공동위원회가 강제병합 문제를 안건으로 올리지도 못한 점을 감안하면 역사 해석의 대단한 진전이라 할 수 있다.

두 나라 지식인들은 한·일병합 100년을 맞는 올해를 양국 관계 전환의 기회로 삼고자 했다. 더 이상 미룰 수 없었다고 한다. 그 같은 공감대가 모여 이제까지 없었던 징검다리를 하나 놓았다. 새로운 역사 인식으로 가는 징검다리다. 앞으로 징검다리가 더 많이 놓여야 할 것이다. 징검다리가 이어지며 마침내 양국 정상에 닿길 기대해 본다. 공동성명에 서명한 양국 지식인의 소망도 그것이다. 경제로 성공한 두 나라가 역사·문화 방면에서도 만만치 않은 저력을 세계에 과시하는 기회가 될 것이다.

오는 8월 15일 한·일 정상이 양국 지식인 공동성명을 존중한다는 선언을 발표하면 어떨까. 꼭 8월 15일이 아니어도 좋다. 가해자-피해자로 극명히 나뉜 지난 100년의 갈등을 넘어 상생의 새로운 100년을 열어가자는 정신에 공감하는 일이 중요할 것이다. 특별 이벤트를 위해선 지식인 공동성명의 의미를 명확히 하는 일이 필요할 것 같다. 지식인 선언은 어떤 국제법적 구속력도 갖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 같은 구속력을 기대한다면 문제는 더 꼬이고 복잡해지는 역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 양국 지식인들의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는 외침, 거기에 담긴 상징성을 살려 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이다. 꽉 막힌 역사의 체증을 잠시나마 시원하게 뚫어준 5월 10일의 지식인 외침이 새로운 100년을 여는 ‘역사적 사건’이 되길 기대한다.

배영대 문화스포츠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