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외교, ABM혼선 · 꽁치분쟁· 사형파문 번번이 뒷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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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한국 외교의 총체적 부실이 잇따라 드러나고 있다. 올 들어 외교통상부는 미국 정책과 배치되는 '한.러간 탄도탄제한협정(ABM) 보존.강화'합의로 한바탕 홍역을 치렀다.

이어 러.일이 추진한 '한국의 꽁치 조업 배제'에 대한 늑장 대응이 불거져나오더니 국가 신뢰도에 먹칠을 한 마약사범 신모(41)씨 문제까지 터져나왔다.

특히 정부가 재외국민 보호에 뒷짐을 진 것으로 드러난 신씨 문제에 대한 국민의 비난 여론은 거세다.

정부는 21세기 외교의 비전으로 '4강을 넘어'를 내놓았지만 전략 부재, 무사 안일주의로 4강의 문턱도 못넘고 있다.

◇ "나사가 풀렸다"=정부의 신씨 사건 대응과정은 외교의 기본에 대한 의문을 던져준다. 재외국민의 생명과 재산 보호가 재외 공관의 기본 임무인데도 중국 내 수형자 문제는 사실상 손을 놓고 있었다.

외교관의 기강에 나사가 풀리지 않고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지적들이다. 여기에 순환 보직인 만큼 어물쩍 업무를 때우는 식의 무사안일주의 또한 한몫했다는 얘기도 나온다.

전직 대사 K씨는 "중국쪽 영사 업무가 폭주하는 것은 알지만 있어서는 안될 일이 벌어졌다"고 말한다.

특히 지난 9월 한승수(韓昇洙)외교부 장관이 유엔총회 의장에 임명돼 자리를 장기간 비우면서 공직 기강이 더 해이해지고 있다. 이에 따른 원활한 업무 조정도 문제라는 지적이다.

◇ "눈앞만 본다"=러시아와의 ABM 보존.강화 합의, 꽁치조업 문제는 대증적(對症的) 외교의 전형이다.

ABM 문제는 미국의 미사일방어(MD)와 맞물려 세계적 차원의 전략이 걸려 있는데도 눈앞의 대북 정책의 지렛대 확보를 위해 덜렁 러시아의 손을 들어줬다.

부시 미국 행정부의 정책 우선순위와 한.미 동맹관계를 고려하면 "한국은 미국의 동맹국인가"라는 얘기를 들을 만할 정도라는 게 외교전문가들의 시각이다.

한마디로 정세 판단 부족과 전략 부재가 빚은 것이었다.

꽁치문제에 대한 일본측 입장도 새삼스런 것이 아니다. 지난해 러시아와의 어업협정 체결 때 일본의 항의를 받았지만 아무런 손을 쓰지 않다가 뒤통수를 맞은 꼴이 됐다.

남쿠릴열도 4개섬 반환을 전후 최대 외교과제로 보는 일본이 호락호락 물러설 리가 없었다는 분석이다.

일본의 역사 교과서 왜곡 문제도 지난해 초 검정 신청 때부터 밀어붙였다면 결과는 달라졌을 것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전문가들은 대책으로 ▶정부 부처간 유기적 협의에 의한 정책 마련▶외교 교섭의 적절한 정보 공개와 공론화▶공무원 책임주의 확립▶해외 영사 인력 강화 등을 제시하고 있다.

오영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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