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인@리포트] 강명구 서울대 교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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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몇년 전부터 한국대학에도 학술지 논문 게재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철밥통인 대학교수 자리에 새바람을 불어넣기 위해 각 대학들이 교수평가제도를 도입했고, 논문발표 숫자에 따라 월급과 승진에 차등을 두기 시작했다.

소위 SCI(과학논문인용지수), SSCI (사회과학논문인용지수)에 등재된 저널에 논문을 게재하면, 특별 연구비를 보너스로 주는 대학도 생겼다.

학술진흥재단도 한국말로 된 저서 한 권이나 이들 유수 학술지에 실린 논문 한 편에 똑같은 점수를 부여한다.

엄격한 심사절차를 거쳤기 때문에 논문의 수준을 보장할 수 있고, 평가의 객관성을 쉽게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논문평가의 분위기에 따라 국내 학술지들도 엄격한 심사절차를 도입하기 시작했고, 각 학회가 발행하는 논문의 질이 지난 몇 년간 눈에 띄게 좋아진 게 사실이다.

그러나 여기에 커다란 함정이 있다. 서구의 유수 학술지(대부분은 미국)에 논문을 게재하기 위해서는 서구 학자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주류이론이나 서구사회의 문제를 다뤄야 한다. 보편적 이론이나 보편적 문제의식을 다루지 않고 한국의 문제를 소재로 한 논문의 경우 각 학문분야의 1급 학술지에 게재될 확률이 대단히 낮다.

미국의 1급 학술지일수록 '보편적'인(많은 경우 미국적인)이론적 관심사를 다뤄야 하고, 한국사회가 대상이 되는 경우에도 '보편'이론을 뒷받침해주는 사례로 들어가는 게 고작일 것이다.

이렇게 되면 한국의 인문사회과학자들이 쓰는 논문은 한국사회와 한국인을 소재로 하지 않고, 일반적인 사회와 일반적인 인간을 대상으로 연구하게 된다.

그렇지 않아도 한국의 인문사회과학은 한국을 잘 다루지 않는다. 필자가 공부하는 문화연구에도 한국사회의 문화를 다룬 연구는 극히 드물다.

대중문화에 관한 그렇게 많은 서구이론이 소개되었지만, 미군방송이 한국 대중문화에 미친 영향을 분석한 논문은 한 편도 없다.

소비사회의 욕망을 다룬 서구이론을 소개한 논문은 넘쳐흐르는데, 한국의 소비사회의 역사적 형성이라든지 한국소비문화의 특성을 분석한 논문은 한 편도 없다.

믿기 어렵겠지만 이건 사실이다. 서구학계가 포스트모던이론을 만들면, 포스트모던을 논의하고, 다시 모던을 다루면 우리도 모던을 다루는 지식생산의 식민적 조건이 지속되고 있다.

여기서 오해 없기 바란다. 한국사회를 대상으로 연구하는 논문이 필요하다고 해서 한국적인 이론을 주장하거나, 서구이론을 배척해야함을 주장하는 게 전혀 아니다.

오히려 발전된 서구의 이론을 더 정확하고 깊이 있게 배워야만 한다. 다만 무엇이 문제인가, 무엇을 연구할 것인가라고 하는 연구문제 조차 빌려오는 상황이 잘못된 것이다.

그리고 외국 학술지에 논문발표를 최선의 학문활동으로 평가하면 이러한 학계의 풍토를 더욱 왜곡시킬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강명구 교수(서울대.언론정보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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