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 '오만한 북한' 누가 키웠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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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최근 남북한은 당국회담의 장소를 금강산에서 하느냐의 문제를 놓고 일종의 '힘겨루기'를 하고 있다.

급기야 북측은 23일 6차 장관급 회담을 기존 주장대로 금강산에서 28일부터 열자는 대남 전통문을 보내면서 "오늘 중으로 답을 달라"는 최후통첩성 단서까지 달았다.

그동안 북한의 전화통지문과 대남방송 등 10여건의 내용에는 상대를 배려 않는 막무가내식 주장이 들어있었지만,이번처럼 최후통첩성 단서까지 다는 경우는 없었다.그 정도가 점점 심해지는 것이다.

북한은 미국의 테러전쟁과 관련,테러방지를 위한 우리측의 비상대비태세를 문제삼아 "언제 미사일이 발사될지 모르는 위험한 남측에 이산가족을 실은 비행기를 보낼 수 없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반세기 넘는 이산의 아픔 끝에 '죽기 전에 한번 가족을 보게 됐다'며 밤잠을 설치던 2백명 이산가족의 발목을 잡기에는 너무나 군색한 핑계임은 북한 스스로도 잘 알고있으리라고 생각한다.

한술 더 떠 지난달 서울 5차 장관급 회담 막후에서 인도적 차원의 식량지원을 해달라며 손을 내밀던 북측은 "어느 일방이 선심쓰는 척 하지마라"(20일.조평통 서기국 보도)며 태도를 바꿨고,심지어 '가짜 인도주의의 모자를 벗어라'는 표현까지 동원했다.

문제는 북측이 이런 태도를 보이는 데는 우리 정부의 책임도 적지 않다는 점이다.

남북간 합의를 손바닥 뒤집듯 해도,우리측으로부터 '당근'을 얻는데는 차질이 없고,언제든 전통문 한장으로 남측 당국자들은 다시 회담테이블에 앉힐 수 있다는 북한당국의 오만함을 우리가 키워줬다는 얘기다.

이산상봉 좌절에 따른 국민적 실망감을 고려하겠다며 '금강산 회담 불가'입장을 밝혔던 정부가 "장관급회담마저 깨지면 큰일"이라며 어떻게든 끈을 놓지 않으려 연연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정부는 이제라도 의연한 자세를 가다듬어 북측이 이성을 되찾고 회담장에 제발로 나올 때를 기다렸으면 한다. 회담장소를 둘러싼 시비는 결국 미국의 테러전쟁,'적절한' 상봉대상자의 고갈 등으로 장고(長考)가 필요한 북측의 시간벌기 카드라는 점을 인정해주고 결코 서둘지 말라는 것이다.

'회담을 위한 회담'은 남북관계 진전에 아무 보탬이 될 수 없다.

이영종 통일외교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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