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하오! 중국] 8. 상도의 고장 안후이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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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중원(中原)의 땅에서 양쯔(揚子)강 이남으로 움직이는 길목에 안후이(安徽)성이 자리잡고 있다. '귤이 회수를 넘으면 탱자로 변한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이 의미하듯 안후이성을 흐르는 화이허(淮河.회수)는 중국 남북의 문화가 교차하는 지역이다.

지역적으로는 남방에 가깝지만 북방의 인정미를 갖춘 이 지역 사람들의 기질은 독특하다. 안후이성 운수사업에 뛰어든 한국 금호고속의 허페이(合肥)지사 유정기(柳正琪)차장은 "느긋한 성격이 마치 우리나라의 충청도 사람 기질"이라며 "현지인 직원들을 시켜 상하이(上海)나 후베이(湖北)사람들에게 돈을 받아 오라고 하면 흥정 끝에 결국 손해를 보고 오는 경우가 다반사"라고 경험을 털어놨다. 유교적 기풍이 강하기 때문인지 사람들과의 교제에서 도덕과 예절을 따지다가 약삭빠른 이웃 지역 사람들에게 금전적으로 '당하기' 일쑤라는 말이다.

중국에서의 생활이 8년째라는 柳차장은 이어 "시장에서 물건을 살 때 '맛을 먼저 본 다음에 사도 괜찮다'거나 잔돈을 아예 깎아주는 경우는 안후이 사람들에게서 처음 경험했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이들이 한때 중국의 경제를 좌지우지한 적이 있다. 명(明)대와 청(淸)대에 산시(山西)성 상인들과 함께 중국의 상업을 주름잡은 이른바 '휘상(徽商)'은 이 지역 출신 상인들을 일컫는 단어다.

중국의 산(山) 가운데 풍광이 으뜸이라는 안후이성 남부의 황산(黃山) 일대는 명.청대에 휘주부(徽州府)가 들어섰던 지역으로 이들 휘상의 근거지다. 평지보다 산지가 훨씬 많아 농사가 여의치 못했던 이 지역 사람들은 자고로 학문을 닦아 벼슬길에 나아가거나 상업으로 돈을 버는 일을 택했다.

허페이 중국과학기술대학 자오전시(趙振西)교수는 "지금의 안후이성 문화는 대개 옛 휘주부가 들어섰던 지역을 중심으로 형성됐다. 산지가 많아 사람들의 생활이 어려웠던 이 지역에서는 송대 정호(程顥).정이(程).주희(朱熹) 등 대학자 아니면 유명한 상인이 많이 나왔다"고 소개했다. 보따리를 짊어지고 문을 나서 전국을 떠돌아 다니며 돈을 벌어야 했던 이들 휘상이 남긴 일화는 셀 수 없을 만큼 많다.

보통 집을 떠나 중국 전역을 떠돌아다니는 데 10년 이상 걸리고, 때로는 30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오는 상인들이 비일비재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 지역에는 예부터 생과부로 삶을 마친 여인들이 많았고 거금을 벌어 뒤늦게 고향으로 돌아온 남편들이 이들의 정절을 기리기 위해 올린 일종의 정문(旌門:중국에서는 牌坊이라고 한다)이 자주 세워졌다.

남편을 기다리며 매년 새해를 맞이할 때 구슬을 하나씩 사들였던 여인이 죽은 지 3년 뒤에 돌아온 남편은 서랍 속에서 20여개의 구슬을 보고 통곡했다는 내용의 '기세주(記歲珠)'일화는 지금도 간혹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곤 한다.

또 집을 나선 남편을 기다리는 것이 무료해 저녁이 오면 동전 한 움큼을 땅바닥에 뿌렸다가 다시 줍는 일을 새벽까지 반복하다 곤한 잠에 빠져들곤 했다는 여인들의 이야기도 전해져 온다.

여인네들의 이같은 희생을 바탕으로 발흥한 휘상들은 소금과 차, 포목과 목재 등 생필품에서부터 서적.벼루와 먹 등 문방용구 등을 취급했다. 이 가운데 특히 소금은 휘상들이 고향에서 대량으로 배출된 고위 관료들의 비호를 받아 전매권까지 받아 내 떼돈을 벌어들였다.

허페이 과학기술대학 MBA과정의 추쉐린(儲雪林)원장은 "휘상의 최대 특징은 관아를 끼고 발달한 일종의 관상(官商:관변 상인)이며 또한 유교적인 질서를 매우 따졌던 유상(儒商)이라는 점"이라며 "이들은 특히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매우 중요시하면서 상업적인 발전을 이룩해갔다"고 말했다.

안후이성 남쪽에 위치한 휘상들의 고향에는 당시 그들이 거대한 재산을 쌓은 뒤 올렸던 사당(祠堂)과 호화 주택들이 많이 남아 있다. 북방의 사합원(四合院)식 구조에 개방성을 덧붙여 만든 안후이성 전통 주택은 구조상의 특징과 외면상의 아름다움으로 현재 건축학자들의 집중적인 연구 대상이 되고 있다.

추쉐린 교수는 "수판의 셈법이 휘상들에 의해 개발되는 등 상업적인 기술의 개발과 전승이 활발했다"며 "특히 유교적인 분위기가 강했던 휘주 지역의 사람들은 가족에 의한 기술 전승이 다른 지역에 비해 잘 이뤄져 상업적인 우위를 수백년 동안 유지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안후이성이 배출한 인물 중 가장 대표적인 사람을 꼽으라고 하자 방문 기간 중 만났던 사람들은 대부분 중국 청백리의 상징인 포청천(包靑天)과 명왕조를 연 주원장(朱元璋)을 꼽았다. 황제의 사위를 벌하고 각종 탐관오리들을 단두대에 올린 포청천은 아직도 안후이성 사람들로부터 대단한 존경을 받고 있다. 주원장 또한 명을 개국한 황제로서 이들이 자랑스러워하는 인물임에 틀림 없다.

춘추전국 시대 제(齊)나라의 재상으로서 탁월한 국가경영을 선보였던 관중(管仲),한(漢)대의 군사전략가 장량(張良), 『삼국지』로 너무 유명한 조조(曺操)와 주유(周瑜), 청대 문단을 주도했던 동성파(桐城派)의 방포(方苞), 청대 말엽 중국의 개혁.개방을 앞장서 끌고 나갔던 리훙장(李鴻章), 중국 현대 5.4운동을 주도했던 후스(胡適)와 공산당 창당을 이끌었던 천두슈(陳獨秀) 등이 있다.

이처럼 유명 인물을 많이 배출한 배경은 휘주 지역의 가난과 이를 이겨내기 위해 독서와 상업을 중시했던 휘주 사람들의 인문적인 전통이라는 점에 대다수 학자들의 의견이 일치했다.

휘상들의 자랑스럽고 오래된 전통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안후이성의 경제는 연해 개방지역에 비해 몹시 낙후해 있다. 미국에서 경영학을 공부하기도 했다는 추쉐린 교수는 "현대적인 경영 개념과 비교할 때 지난날 휘상들의 경영기법은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유상(儒商)으로서의 휘상들이 지닌 장점은 한번 되돌아 볼 필요가 있지 않으냐는 질문에 중국인들은 별로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개혁.개방이 시작된 지 이제 23년, 숨돌릴 틈 없이 돈을 향해 뛰는 중국인들에게 이는 아직 사치스러운 질문인지도 모르겠다.

특별취재반=유광종 문화부 기자.유상철 베이징특파원.진세근 홍콩특파원

*** 두부 원산지 바궁산

*** 두부 원산지 바궁산

안후이성 화이허(淮河) 남쪽의 화이난(淮南)시 바궁산(八公山)이 이제 세계적인 음식으로 성장한 중국 두부의 원산지다. 바궁산 밑의 화이베이(淮北)평원은 콩이 많이 나기로 예부터 유명한 곳.

두부를 처음 만든 사람에 대한 설은 여럿 있지만 현재는 우리에게 『회남자』로 잘 알려진 회남왕 유안(劉安)이 시조라는 게 정설이다.

한(漢)고조 유방(劉邦)의 손자인 유안(BC 179~BC 122)은 화이난의 바궁산 일대에 거처하면서 각종 신선.의학.점성 등의 방술(方術)에 능한 사람들을 거느리고 살았는데 이 과정에서 우연하게 두부를 발명했다는 것이다.

두부의 원산지라고 할 수 있는 바궁산 두부는 아직도 유명하다. 특히 백옥같은 색깔과 부드러운 질감이 잘 어울려 중국 내에서 많은 찬사를 받는다. 이를 이용해 탕을 만드는 것으로 세 가지 요리가 유명한데, 두부를 탕 위에 띄우는 '표탕(漂湯)', 탕 색깔이 젖과 같다는 '내탕', 맛이 뛰어나다는 '인조계탕(人造鷄湯)'이 바궁산 두부탕의 삼절(三絶)이다.

이밖에 주원장이 걸승(乞僧)으로 유랑하던 시절 즐겨 먹었다가 나중에 황제가 된 뒤 당시 두부를 자신에게 만들어줬던 동료를 황궁요리사로 불러들여 다시 만들게 했다는 '주홍무두부(朱洪武豆腐:홍무는 주원장의 연호.사진)'가 유명하다.

<도움말 신계숙 중국요리전문가.배화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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