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해신 - 제1부 질풍노도 (46)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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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신라의 제42대 왕인 흥덕왕(興德王)3년. 그러니까 서력으로 828년 4월.

이 무렵 흥덕왕을 배알하기 위해서 왕도 서라벌로 올라오는 사람이 있었으니 그의 이름은 장보고(張保皐)라 하였다. 그의 원 이름은 궁복(弓福), 또는 궁파(弓巴)라 불렸는데 이는 '활보' , 즉 '활을 잘 쏘는 사람' 이란 뜻이었다. 그런 그가 장보고란 이름을 가진 것은 중국에서 대성이었던 장씨를 모칭해서 개명한 것으로, 이를 보면 알 수 있듯이 그는 방금 중국의 당나라에서 귀국하는 길이었던 것이었다.

그뿐인가.

장보고는 일찍이 당나라에 들어가 서주(徐州) 무령군(武寧軍)에 입대하여 장교가 되었으며 당나라 조정으로 보면 반란군을 진압한 큰 무공을 세워 군중 소장(小將)으로까지 오른 입지전적 인물이었던 것이었다.

처음에 장보고가 경주에 입성하여 흥덕대왕을 진알(進謁)하겠다는 전갈을 보내왔을 때 모든 신하들은 이를 극구 반대하였다. 특히 시중(時中)이었던 김우징(金祐徵)은 극간하여 이를 만류하였다.

"대왕마마, 장보고는 원래 미천한 천민 출신으로, 또한 섬사람 즉 해도인(海島人)이나이다. 그런고로 그를 입조하여 대왕마마를 배알케 하는 것은 도리에 어긋나는 일이 아닐 수 없나이다. "

하지만 대왕 흥덕의 고집 또한 만만치 않았다. 대왕의 원 이름은 수종(秀宗) 또는 경휘(景暉)라 하였는데, 비교적 늙은 나이인 50세에 왕위에 오른 고령이었으므로 모든 신하들은 대왕보다 나이가 어렸던 것이었다.

"허지만. "

대왕은 말하였다.

"장보고가 해도인으로 천민출신이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일찍이 입당하여 나라에 큰 공을 세워 군중소장에까지 오른 공신이 아니더냐. 당나라의 공신이라면 마땅히 우리 신라에게도 공신이 아닐 것이냐. "

"하오나. "

김우징이 다시 말하였다.

"그가 태어난 곳은 청해(淸海)라 하옵는데 이는 옛날 백제의 땅이나이다. 따라서 장보고는 백제인으로 그를 왕도에 입성케 하옵는 것은 반적의 후예를 맞아들이는 것과 마찬가지나이다. "

그러자 흥덕대왕은 껄껄 웃으면서 말하였다.

"장보고가 백제인이라서 입조할 수 없다니, 이는 벌써 수백년 전의 일이 아닐 것이냐. 수백년 전 과거의 일을 연유로 삼다니. 이제 신라국 중 어느 곳에 백제가 따로 있고, 고구려가 따로 있겠느냐. "

흥덕대왕의 말은 사실이었다.

신라 30대왕인 문무대왕이 삼국통일의 위업을 완성한 것은 676년의 일로 이미 12대가 앞서 있던 선대의 일이었으며 또한 정확한 횟수로 1백52년 전의 일이었던 것이었다.

거의 2백년 전 과거의 일을 연유로 삼아 백제인이 어디에 있고, 고구려인이 어디 있겠느냐는 흥덕대왕의 의지는 바로 그가 가진 강력한 개혁정신 때문이었다. 흥덕대왕은 이미 쇠퇴기로 접어들기 시작하였던 신라의 말기에 홀연히 나타난 정치개혁자였다.

사학계에서는 신라 천년의 역사를 상.중.하의 3대로 나눴는데 상대를 654년 김춘추(金春秋)가 진덕여왕의 뒤를 이어 태종 무열왕(太宗 武烈王)으로 즉위함으로써 끝나고, 중대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정설로 하고 있으며, 또한 780년 진골귀족들의 반란으로 선덕왕(宣德王)이 즉위함으로써 하대가 시작되었는데, 이 하대에 있어 썩어가고 부패에 빠진 신라왕조를 어떻게든 개혁해 보려고 노력했던 중심인물이 바로 흥덕대왕이었던 것이었다.

이는 신라국왕의 능비문(陵碑文)으로는 유일하게 남아 있는 흥덕왕 능비의 단석(斷石)을 통해서도 알 수 있는 것이다.

1930년대 중반께 경주의 북쪽 안강읍(安康邑)현지에서 6점이 발견된 이래 1977년 8월 경주국립박물관의 발굴조사단에 의해 60점이 발견되어 지금까지 총 90여점이 발견된 단석에는 흥덕대왕의 개혁의지를 나타내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는 것이다.

"신모결단(神謀決斷)"

'신과 같은 지혜와 결단을 가진 사람' 이라는 예찬답게 흥덕대왕은 강력한 개혁의지를 가진 인물이었던 것이었다. 만일 그의 결단이 아니었더라면 해상왕 장보고 역시 탄생되지 못하였을 것이다.

글=최인호

그림=이우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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