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는 퇴계] 2. 무엇을 어떻게 계승할까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2면

한국의 전통사상은 근세에 이르러 개화와 일제 강점 그리고 그 뒤를 이어 근대화라는 역사적 과정을 거치면서 극도의 단절과 침체를 거듭해 왔다. 그러다 1980년대부터 계승의 움직임이 일어나 각 분야에서 상당한 성공을 이룩하고 있는 사실은 매우 고무적인 현상이다.

이러한 역사적 흐름에 병행하여 퇴계 이황에 관한 그간의 연구도 많은 업적을 이룩하였을 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널리 확산되고 있다.

새로운 천년을 출발하는 올해 퇴계 탄신 500주년을 맞게 돼 국내에서는 여러 뜻 깊은 기념 행사들이 진행되고 있다. 이를 계기로 아직까지 그리 활발하게 논의되지 못했던, 퇴계 사상을 어떻게 무엇을 계승해야 할 것인가에 관한 문제제기가 긴요하다고 생각된다.

퇴계의 사상과 학문은 그 내용이 아주 광범하고 풍부하고 깊어서 과거의 많은 학자들이 깊은 바다와 높은 산에 비유하였다. 그 중에 현대인들이 가장 우선적으로 계승해야 할 사상이 무엇일까□

사람들은 각기 자신의 관점에 따라 그의 심성론.윤리관.예학(禮學).정치사상.자연관 등등을 계승해야 할 것이라 말한다. 이렇게 많은 견해들 중에 무엇이 퇴계학의 가장 핵심적인 사상인가를 판단하는 것은 전문학자들에 있어서도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면 우리는 퇴계에게 직접 물어보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만약 퇴계가 오늘날 생존해서 사람들이 새로운 천년을 살아갈 길을 배우려고 한다면 그는 이미 어린 선조 대왕에게 가르친 성인이 되는 학문(聖學)을 배우라 할 것이다.

이 학문의 내용과 공부하고 실천하는 방법을 그는 열 폭의 그림으로 완성하였다. 이것이 그 유명한 성학십도(聖學十圖)다. 이 성학이 퇴계 사상의 가장 핵심이며 오늘날 이것을 계승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된다.

이렇게 말하면 많은 사람들은 시대착오적이라고 비판할 것이다. 과학과 물질문명 시대에 성인군자와 윤리도덕을 추구한다면 국제사회에 낙오자가 되어 인류사회에 퇴출되고 말 것이라고. 개화기의 지식인들이 이미 그렇게 비판하였다. 그 시대에 과학기술을 배우지 않고 공자 맹자를 배우면 밥 굶기에 알맞다고.

그러나 과학.기술.경제만 발전한다고 인간의 행복이 결코 실현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윤리 도덕만으로도 인간은 생존할 수 없다. 그러므로 퇴계는 관직에서 물러나 향리로 돌아왔을 때는 직접 농사를 관리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오늘의 국립대학 총장에 해당하는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의 관리직을 역임했던 퇴계가 오늘날 다시 그 직책을 맡는다면 누구 못지 않게 기술교육과 경제교육을 실시할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교육을 반드시 성인이 되는 교육의 바탕 위에서 실시할 것이다.

성인이라면 사람들은 신비로운 존재요 하늘이 낳은 특이한 사람으로 생각해 왔다. 그러나 성리학에서 말하는 성인은 결코 그런 사람이 아니고 덕성과 지혜와 정의감이 투철한 완전한 인격의 소유자를 말한다.

범인(凡人)도 철저한 자기수양을 통하여 이런 경지에 이르면 성인이 될 수 있고 유식하고 총명한 사람도 이런 수양이 없으면 망나니가 된다는 것이 퇴계의 사상이다.

인간이 성인의 인격을 갖추지 못할 때 작게는 사소한 비양심, 부도덕한 행위를 하는 소인의 무리나 사기꾼으로 전락하지만 크게는 천인공노할 인류적 범죄의 원흉이 된다. 진시황의 분서갱유(焚書坑儒), 네로의 로마 파괴,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 그리고 최근 일어난 미국의 무역센터 테러행위 등은 인류적 죄악의 대표적인 예이다.

이런 행위의 주범들이 만약 조그마한 도덕적 인격이라도 있었다면 천인공노할 죄악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퇴계가 오늘날에도 성인의 학문을 배워야 한다고 가르치는 깊은 뜻이 여기에 이르러 극명하게 드러난다.

이런 퇴계 사상을 우리는 어떻게 계승할 것인가? 그것은 교육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러나 제도교육은 현대인들에게 가르쳐야 할 필수과목들이 너무 많아 새로운 과목을 추가할 여지가 없다. 불교나 기독교가 사원이나 교회에서 종교교육을 하듯 퇴계학은 문화원.향교.서원에서 해야 할 것이나 이들이 그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는 데 큰 문제가 있다. 앞으로의 실현이 기대된다.

우리는 이제 퇴계 사상을 계승하여, 지식정보사회에서 한걸음 더 나아간 도덕산업사회를 열어 가는 것을 새 천년의 목표로 삼아야 할 것이다.

신귀현 <영남대학교 명예교수. 현상학 전공>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