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해신 - 제1부 질풍노도 (41)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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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제2장 신라명신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타임머신을 타고 1천2백년 전의 삼차원 세계로 들어가 장보고의 얼굴을 직접 내 눈으로 확인한 것이다.

나는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가 없었다. 흥분상태가 좀처럼 가라앉고 있지 않았다.

나는 심호흡을 하면서 천천히 다시 행길을 따라 걸어가기 시작하였다.

'홍문천황어릉(弘文天皇御陵)'

거리의 갈림길 어귀에는 작은 표석 하나가 세워져 있었다. 지난 가을 대우왕자의 무덤을 찾아가기 위해서 왔을 때 발견했었던 이정표였다.

지난 가을에는 신라사부로의 붉은 갑옷을 발견하기 위해서 미데라를 찾아왔다가 우연히 홍문천황의 무덤을 찾아갔었다.

그러나 그 참배에서 나는 뜻밖의 소득을 얻게 되었던 것이었다.

무덤을 참배하고 돌아가던 도중에 신라선신당을 발견할 수 있었으며, 신라사부로가 바로 그 선신당 앞에서 성인식을 올릴 때 개명하였음을 알게 된 나는 그 이후부터 선신당 안에 모셔져 있는 신라명신에 대해 강렬한 호기심을 느끼게 되지 않았던가.

마찬가지로.

나는 지난 가을 내가 찾아갔었던 언덕길을 따라 오르면서 생각하였다.

신라사부로의 무덤을 참배하러 가는 그 도중에 나는 뜻밖에도 전혀 생각지 않았던 장보고의 초상을 만나게 된 것이다. 신라명신의 실제 모델이 바로 장보고임을 발견해낸 것이다.

엔닌(圓仁).

일본 불교사상 가장 뛰어났던 고승. 속성이 미부(壬生)씨로 서기 794년 일본의 시모스케(下野)국에서 태어나 15세에 출가하여 일본천태종의 창시자인 사이초(最澄)밑에서 수행을 시작했던 고승. 이미 일본천태종의 제1인자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45세가 되던 838년, 견당선을 타고 당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는 엔랴쿠지(延曆寺)에 완질(完帙)이 갖추어지지 않은 '천태교의(天台敎義)' 를 수집하고, 양주(揚州)오대산, 장안 등에서 고승을 찾아 불법과 범어.한문 등을 배우고 성지를 순례한다. 결국 당 무종(武宗)의 회창(會昌)연간의 숱한 법난, 온갖 고초와 가난을 겪으면서도 마침내 불교 장소(長疏)만다라(曼茶羅) 등 5백89부, 7백94권의 자료를 모아 847년 귀국하는 것이다.

돌아온 엔닌은 오대산에서 가져온 불경을 깊이 연구하여 법화총지원(法華總持院)을 지어 전교하다가 서기 864년 정월 14일에 71세의 나이로 입적하는 것이다. 이때 천왕 세이와(淸和)는 그에게 자각대사(慈覺大師)라는 시호를 내렸는데, 이는 일본불교에서 대사의 칭호가 처음으로 쓰여진 일이었다.

자각대사 엔닌.

그는 10년 동안 당나라에 있으면서 유형무형으로 신라인들 특히 당시 신라인들의 맹주였던 장보고의 도움을 많이 받았던 것이었다.

엔닌의 일기에 기록한 것처럼 '장보고가 세운 적산법화원' 이라는 신라 절에서 오랫동안 머무르는 은덕을 입었을 뿐 아니라 본국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직접 장보고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쓰지 않았던가.

"…태어나서 지금까지 삼가 만나뵈옵지는 못하였지만 오랫동안 높으신 이름을 들어왔기에 흠모의 정은 더해만 갑니다. 봄은 한창이어서 이미 따사롭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대사님의 존체거동에 만복하시기를 비옵니다. 이 엔닌은 멀리서 인덕을 입사옵고 우러러 받드는 마음 끝이 없습니다.

엔닌은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 당나라에 체류하고 있습니다. 미천한 몸 다행스럽게도 대사님의 본원의 땅(적산법화원)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감사하고 즐겁다는 말 이외에 달리 드릴만한 말이 없습니다…. "

이 이상의 존칭이 또 어디 있겠는가. 이 이상의 존대말이 또 어디 있겠는가. 일본 최고의 고승 자각대사로부터 최고의 경어를 받은 대사 장보고.

언덕길은 점점 좁아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연이어 지어진 작은 주택들이 언덕길 한쪽에 자리 잡고 있었으나 오를수록 인가는 사라지고 차 한대가 겨우 빠져나갈 만큼의 좁은 숲길이 이어지고 있었다.

숲은 한낮에도 봄의 햇살이 스며들지 않을 만큼 울창하고 어두웠다. 그 숲 속에 있는 신라사부로의 무덤을 찾아가면서 나는 문득 생각했다.

그렇다.

미나모토노 요시미쓰(源義光)는 신라명신 앞에서 성인식을 올림으로써 장보고의 후예로 거듭 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장보고의 양아들인 것이다.

글=최인호

그림=이우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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