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황제를 위하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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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필자는 최근 이문열의 장편소설 『황제를 위하여』를 다시 읽었다.

20여년 만인데도 처음 읽을 때 느꼈던 유머와 신랄한 풍자, 곳곳에 밴 페이소스가 여전히 다가왔다. 때아닌 재독(再讀)은 순전히 최재승 국회 문화관광위원장(민주당 의원) 덕분이다.

崔의원은 나흘 전 문예진흥원 국정감사에서 서면질의를 통해 "문예진흥원이 발간을 추진 중인 '통일문학전집' 수록작품 선정에 있어 발간취지에 어울리지 않는 작가의 작품이 선정돼 있다" 고 주장했다.

작가는 이문열씨고, 작품은 『황제를 위하여』와 『사람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李씨가 '개혁을 방해하고 평화통일을 저해하는 작가' 이므로 선정해선 안된다는 요지였다.

『황제를…』는 자기가 정감록이 정한 이 땅의 황제라고 믿는 '교양있게 미친 사람' 의 일대기다. 그는 1895년에 태어나 '신하' 몇명과 함께 평생 기행(奇行)을 일삼았고, 그 대가로 고생도 죽도록 한다.

낡은 화승총과 화살 몇개로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는가 하면 참나무 뼈대에 광목을 입혀 만든 비행기를 띄우려다 중상을 입기도 한다.

황제인 자기와 생각이 다른 공산주의자는 '공산비(共産匪)' 로 불렀고, 대한민국도 '남비(南匪)' 라며 경멸했다.

자칭 황제는 1972년 "재미있는 놀이를 하던 아이도 해가 지면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법" 이라는 말을 남기고 생을 마친다.

'백성제(白聖帝)' 로 불린 그가 다스리던 '사이버 국가' 의 국호는 '남조선' 이었고 사후 무덤은 '덕릉(德陵)' 이 된다.

소설은 한 잡지사 기자가 기사거리를 찾아 계룡산 일대를 헤매다 덕릉을 발견하면서 줄거리가 풀리기 시작한다. 작가 李씨는 소설의 의도를 '양 극단에 대한 빈정거림' 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황제를…』는 영어.일어.프랑스어.이탈리아어로 번역됐고, 평론가들이 선정한 '건국 이후 뛰어난 소설' 에서 20위에 꼽힌 적도 있다. 아무리 작가의 평소 소행(?)을 괘씸하게 느꼈더라도 다른 분야도 아닌 문화담당 국회 상임위원장이 그런 상식 밖의 주장을 펼 수 있는 건지 의아하다.

崔의원과 같은 동교동 비서 출신인 남궁진 신임 문화관광부장관은 그나마 취임 기자간담회에서 "틈나면 중.고교 시절 읽었던 문학작품을 되풀이해 읽는다" 며 "최근 『노인과 바다』를 읽었다" 고 말했다고 한다.

내친 김에 『황제를…』도 손에 잡길 권한다.

노재현 정치부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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