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옴부즈맨 칼럼] 미 시각으로 읽는 테러대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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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이번 테러 사건은 최근 개봉한 영화 '무사' 의 흥행에 최대 악재" 라고 영화감독인 동료교수 한 사람이 말했다. 사실이 그렇다.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이 현실을 두고 누가 굳이 영화관을 찾겠는가.

지난 11일 이후 영화에서나 보던 초현실적 드라마가 텔레비전과 신문을 통해 연일 보도되고 있다. 상상을 넘어선 충격적인 각본과 스케일, 시시각각 드러나는 풍부한 디테일로 이뤄진 이 '완벽한 영화' 를 능가할 작품은 물론 시중에 없었다.

텔레비전 방송들은 웬만한 연속극은 빼고 뉴스 속보와 CNN 중계를 내보냈으며, 신문들은 일제히 맨해튼과 워싱턴의 원색 사진으로 지면을 도배했다. 이로써 텔레비전 뉴스와 신문들이 지난주 최고의 관객 동원을 기록했다면 지나친 말일까.

모든 신문이 똑같은 외신 사진을 받아 이 사건을 보도하는 가운데 중앙일보는 사진 선택과 배치에서 한 발 앞선 감각을 보여주었다.

특히 13일자 1면 헤드라인 위에 파격적으로 배치한, 현장을 빠져나오는 기진맥진한 군상들의 단색조 사진은 탁월한 선택으로 평가할 만하다. 14일자 폐허 속의 성조기 게양과, 15일자 항공모함의 전투기 장면 역시 상황을 설득력 있게 압축한 사진들이었다.

13일자부터는 '테러대전' 이라는 간판을 걸고 사건의 여러 국면을 입체적으로 전달했다. 사진과 그래픽을 이용한 시각적 편집, 요점을 정리한 박스기사들, 그리고 사회면의 한국교민 관련 보도들도 각기 제 몫을 했다.

그러나 기획과 편집부문에서의 이러한 입체성에 비하면 사건을 보는 시각의 입체성은 크게 부족했다는 지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물론 중앙일보만이 아닌 국내 언론사 모두에 공통된 문제다.

국내 언론들은 이번 사태를 보도하면서 거의 전적으로 미국발 외신에 의존하고 있다. CNN이나 미국 신문과 방송, 그리고 통신사들의 보도내용을 번역해 싣다 보니, 각 신문의 기사와 사진, 편집방향이 대동소이할 수밖에 없다.

사건이 미국에서 일어났으므로 기사들이 미국에서 취재되고 현지 언론 보도가 인용되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논평에서는 사정이 다르다. 제3국들의 다양한 관점과 아랍권의 입장도 들어봐야 사태를 균형있게 파악할 수 있다.

14, 15일에 실린 키신저 전 장관의 칼럼이나 헤럴드 트리뷴지의 칼럼 등은 미국의 강경보복 입장만을 대변하고 있다. 같은 시기 유럽 신문들의 사설이나 칼럼의 논조는 이와 사뭇 달랐는데, 그런 내용은 소개되지 않았다.

이번 테러와 관련한 여러 관점을 제시하고, 이를 토대로 지난 주말께에는 국내 각계인사들에 의한 집중 토론을 실을 수는 없었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런 중에도 '테러 배후의 철저한 추적' (13일), '보복과 응징의 한계, 우리의 대응방안' (14일), 그리고 '미국의 보복 공격에 대한 우려' (15일)로 이어진 사설은 사태를 침착하게 파악하려는 태도를 견지해 인상적이었다. 감정적 흥분을 가라앉히고 이성적 판단을 주문하는 이런 목소리들은 사설 외의 기사들에서도 간간이 나오고 있었지만 대세 속에서 소수의견으로 묻혀버린 느낌이다.

그동안의 보도에 따르면 이번 주에는 다시금 초강대국 대 세계 최빈국 간의 전쟁이라는 새 드라마가 예고돼 있다.

이런 21세기의 현실을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영화와 연극, 문학과 미술은 이번 주에도 고전할 것이고, 텔레비전은 또다시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현실을 현장 중계할 것이다. 부디 이번 주에는 신문이 현장에서 한발 물러서 반성적 시점을 제공하는 데 더 노력할 것을 주문하고 싶다.

안규철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 조각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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