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산은 산 물은 물 (73)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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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73. 시루떡 소동

선머슴으로선 생각지도 못했던 일을 너무 잘하려고 하니 늘 탈이었다. 씨감자 사건으로 한 명뿐이던 일꾼 아저씨가 놀라고 다쳐 한 달 가까이 끙끙거리며 일을 못했다.

어쨌든 그 후 씨감자는 대관령에서 대량재배된 것을 전국 단위농협에서 배급해주는 바람에 더 이상 고생하지 않아도 됐다.

겨울 동안 큰 일은 간장.된장을 만드는 일이다. 김장을 마치고 나서 콩을 삶아 메주를 만들어 양지 바른 곳에 매달아 두었다. 쿰쿰한 곰팡이 냄새가 진동하면서 발효가 한참 되고 나면 음력 정월 말날(午日)에 메주를 깨끗이 씻는다.

그리고 소금물을 만들어 부어서 간장과 된장을 만든다. 메주와 섞인 소금물이 곧 간장이고, 메주 건더기는 된장이다.

그것도 처음엔 쉽지 않았다. 메주를 씻고 소금물을 붓는 날은 온 대중이 나서서 울력(공동작업)을 해야 했다. 소금물 농도가 진하면 된장도 짜서 맛이 없게 되고, 소금물 농도가 연하면 된장이 제대로 되질 않아 소금을 뿌려야 한다. 나중에는 비중계를 써서 소금물의 농도를 맞추었다. 그렇게 궁하면 요령이 생기는가 보다.

그렇게 절살림살이에 약간의 자부심이 생길 무렵, 하루는 큰맘 먹고 스님들을 위해 시루떡을 한번 만들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마을의 떡 잘 만드는 아주머니에게 떡 만드는 방법을 자세히 물었다. 가르쳐 준 순서대로 떡시루에 쌀가루를 한 5㎝ 두께로 한 켜 놓고 그 위에 호두를 고물로 깔고, 또 쌀가루 한 켜 놓고 이번에는 잣을 고물로 깔고, 또 쌀가루 한 켜 놓고 건포도를 고물로 깔고…. 이런 식으로 다섯 겹으로 쌓아서 시루떡을 찌게 되었다.

백철 솥에 물을 붓고 접시를 띄워 놓고 떡시루를 솥에 얹고는 김이 새지 않도록 솥과 떡시루 사이를 쌀가루로 반죽해 바르고 불을 지폈다. 15분 지나니 떡시루 위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기 시작하였다.

'야, 이제 떡이 잘 되는 모양이구나!'

잔뜩 자부심에 부풀어 올랐다. 쾌재를 부르며 불을 열심히 지폈다. 김은 더욱 무럭무럭 피어올라 부엌 가득히 서릴 정도가 되도록 불을 땠다. 한 시간쯤 지나 '이제 떡이 익었겠구나' 싶어 떡시루 뚜껑을 열고 헤집어 보니 웬일인지 떡의 원료인 하얀 쌀가루가 익지도 않고 그대로 있는 것이었다.

그렇게 불을 때고 김이 그렇게 솟아났는데, 나는 속으로 '웬일일까□' 하면서도 이런 의외의 상황에 놀라 더욱 열심히 불을 지폈다. 그렇게 얼마쯤 지나니 속에서 딸깍거리던 접시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본래 떡을 찔 때 솥 속에 물이 얼마나 남았는지 밖에서 알지 못하니 작은 접시를 하나 놓아두고 물이 끓으면 그 힘으로 접시가 들썩들썩하여 바깥으로 딸깍딸깍 소리가 들려오는 것이다. 그 소리가 멎으면 솥 안에 물이 없다고 알게되는 것이다.

접시소리가 들리지 않으니 정신이 번쩍 들어 아궁이 속의 불을 끄집어내고 시루본을 뜯어내고 떡시루를 내려놓고 한참 동안 솥을 식힌 다음 다시 물을 붓고 처음과 같이 시루본을 바르고 다시 불을 때기 시작했다.

그러기를 또 2시간. 쌀가루는 여전히 하얗게 생가루 그대로였다. 그때는 벌써 시루본을 세 번이나 다시 붙인 뒤였다. 도대체 알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하며 골똘히 상념에 잠겨 있는데 느닷없이 성철스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이놈아! 지금 뭐 하고 있는 거고? 아침부터 김이 온 마당에 자욱하고, 지금이 오후 몇 신데 아직까지 불을 때고 있노 말이다. 니가 떡을 찐다고? 니놈이 언제 떡을 해 보았다고 이 난리냐. 내 백련암에서 원주란 놈이 떡 한다고 법석을 떠는 놈은 처음 봤다. 원주 때려치우고 당장 나가거라. 이런 고얀 놈이 어딨어? 당장 나가, 이놈아!"

정말 무안하고 당황스러워 어찌해야 좋을지 몰랐다. 나도 백 번을 양보해도 부엌 아궁이 앞에 앉아 하루 종일 불만 때고 앉았으니 백 번, 천 번 야단을 맞아도 싸기는 싸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이상해 그 떡 잘 하는 아주머니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원택 <성철스님 상좌>

정리=오병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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