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해신 - 제1부 질풍노도 (29)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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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제2장 신라명신

중앙에 앉아 있는 신라명신의 머리 위에는 해와 같은 붉은 원상이 떠 있었는데 그 속에는 본지불(本地佛)인 문수보살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내 시선을 강하게 잡아당긴 것은 신라명신의 발 아래쪽에 앉아 있는 무사의 모습이었다. 전통적인 일본의 무사차림을 하고 있는 사람은 검은 관복을 입고 방석 위에 앉아 있었다.

오른쪽에는 그의 부인 같아 보이기도 하고 딸처럼 보이기도 하는 두명의 여인들이 역시 전통적인 일본의 옷차림을 하고 뭔가 받쳐 올리려는 듯 두손으로 제물을 떠받치고 앉아 있었다. 한눈에 보아도 그 두명의 여인들은 검은 옷을 입은 무사의 가족들임이 분명하였다.

- 이 검은 관복을 입은 사람은 도대체 누구일까.

나는 신라명신의 발 아래에 앉아서 명신에게 최대의 예의를 표하고 있는 그 검은 무사를 바라보면서 강한 호기심을 느꼈다.

문득 내 머릿속으로 지난 가을 우연히 신라선신당 앞에서 발견했던 안내판의 문구가 기억되어 떠올랐다.

'신라선신당(新羅善神堂)

본당은 삼칸 사방의 맞배지붕을 가진 건물이다. 지붕은 노송나무 껍질로 이루어진 아름다운 건물로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역응(曆應)3년 (1339년)아시카가 다카시(足利尊)씨가 재건축하였다…. '

안내판에 적혀 있던 내용이 사실이라면 신라선신당은 1339년 재건축되었다. 신라선신당을 재건한 사람은 아시카가 다카시, 그는 1305년에 태어나 1358년에 죽은 막부(幕府)시대 때의 유명한 장군(將軍)인 것이다.

"이 그림이 그려진 것이 언제쯤 됩니까. "

나는 그림을 쳐다보면서 슌묘 스님에게 물어보았다. 그러자 슌묘는 대답하였다.

"정확하게 알려진 바는 없습니다만, 대충 가마쿠라(鎌倉) 후기의 작품으로 사료되고 있습니다만. "

가마쿠라 막부시대를 연 사람은 신라사부로의 아버지였던 요리요시의 후예인 미나모토 요리토모(源賴朝), 이른바 무사가 정권을 쥠으로써 중세의 봉건사회를 연 것이다.

이 막부시대는 4백여년간 계속되었는데 슌묘 스님의 말대로 이 '신라명신상' 이 그려진 것이 막부의 후기시대로 추측된다면 발 아래 앉아서 신라명신을 경배하고 있는 그 무사의 초상은 어쩌면 신라선신당을 재건한 아시카가 장군인지도 모른다.

"이것 역시 정확한 사실은 아닙니다만 이 신라명신상을 그린 화가는 막부 말기의 레이제이 다메치카(冷泉爲恭)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가 그린 모본(模本)하나가 지금도 교토에 있는 성호원(聖護院)에 남아 있다는 말을 전해 듣기는 하였습니다만. "

슌묘 스님의 말을 듣자 나는 궁금증이 더해졌다. 그래서 나는 손을 들어 신라명신상의 발 아래 앉아 있는 검은 무사를 가리키면서 물어 말하였다.

"그렇다면 스님께서는 이 검은 옷을 입은 무사가 가마쿠라 시대의 유명한 장수 아시카가라고 생각하십니까. 아시카가는 신라선신당을 재건하였습니다. 때문에 화가는 신라명신상을 그리고 있는 이 화상 속에 아시카가 다카시의 초상을 일부러 그려 넣었다고 생각하십니까. "

"아, 아닙니다. "

슌묘는 손을 흔들면서 단호하게 대답하였다.

"이 검은 옷을 입은 무사의 초상은 신라선신당을 재건한 아시카가의 초상은 아닙니다. 물론 아시카가 장군이 선신당을 재건한 것이 1339년이었고, 이 그림이 그려진 것이 그보다 수십년 후인 15세기의 막부 후기였다면 당연히 그 당시 최고의 세력가였던 아시카가 장군의 초상을 일부러 새겨 넣었을지도 모른다고 추측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

슌묘는 잠시 말을 끊고 차를 한잔 들이켰다. 그리고 나서 잠깐동안 후원에 가득 핀 벚꽃을 물끄러미 바라본 후 다시 말을 이었다.

"나는 이 검은 옷을 입은 무사가 아시카가가 아닌 다른 사람임에 틀림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

"그 사람이 누구입니까. "

내가 묻자 슌묘는 간단하게 대답하였다.

"그 사람은 신라사부로(新羅三郞)입니다. "

글=최인호

그림=이우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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