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해신 - 제1부 질풍노도 (26)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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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제2장 신라명신

"손님" .

벚꽃의 아름다움에 취해 잠시 넋을 잃고 있던 내게 노인이 소리쳐 말하였다.

"연락이 왔습니다, 손님. 잠깐만 여기서 기다려주시겠습니까. 손님을 모시러 오겠다는 연락이 있었습니다만. "

"아, 그렇습니까. 감사합니다. "

나는 허리를 굽혀 인사를 했다.

지납소 앞에는 작은 공터가 마련되어 있었다. 경내에서 사용되는 차들이 잠시 주차할 수 있는 공간인 모양이었다. 벚꽃 구경을 나온 한떼의 참배객들이 삼삼오오 떼를 지어 표를 내고 본당으로 가는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때마침 계단 위 본당 쪽에서 종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하였다.

금당 옆 종루(鐘樓)에서 들려오는 만종 소리인 모양이었다. 미데라의 만종은 유명해서 일본의 3대 명종 중의 하나라고 하였다던가. 특히 안개 속에서 들려오는 만종 소리는 오미지방의 팔경 중에서 제칠경(景)으로 알려질 만큼 아름답다고 하던가.

땡 땡 땡….

예부터 오미지방은 비와(琵琶)호수가 뿜어대는 물기로 자주 안개가 끼는 곳. 그러나 화창한 봄 날씨로 오늘은 물안개 대신 눈부신 벚꽃의 운무(雲霧)가 자욱이 경내를 뒤덮고 있는 것이다.

팔짱을 끼고 들려오는 종소리를 듣고 있는데 어디선가 승용차 한 대가 나타났다. 차 속에서 승복을 입은 승려 한사람이 뛰어내렸다.

"최선생님이십니까. "

"그렇습니다만. "

"차에 오르시지요. 제가 안내를 하겠습니다. "

차에 오르자 곧 출발하였다. 운전을 하면서 승려는 말하였다.

"제가 어제 저녁 선생님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던 바로 그 사람입니다. 슌묘 스님께 오늘 오전에 오신다고 말씀드렸더니 마침 스님께서도 선생님을 만나 뵙겠다고 지금 기다리고 계십니다. 늘 공사다망하신 스님이신데 다행스럽게도 오전 중에는 특별한 일이 없으시다고 하십니다. "

차는 금당을 끼고 오른쪽으로 난 샛길을 오르기 시작하였다. 계단을 따라 형성된 숲은 온통 벚꽃으로 이루어진 터널이었다.

"마침 잘 오셨습니다. 오늘이 벚꽃의 절정입니다. 오늘밤 비가 내린다는 기상예보가 있었습니다만 그렇게 되면 내일은 하룻밤 사이에 꽃들은 모두 져버릴 것 같습니다. "

해마다 이맘 때면 일본의 전 매스컴들은 다투어 북상하는 화신(花信)의 정보를 보도하고 있는 것이다. 하루 아침에 저 많은 벚꽃들이 져버릴 것이라는 승려의 말을 듣자 나는 문득 이큐(一休)의 선시 하나를 떠올렸다.

"벚나무의 가지를

부러뜨려 봐도

그 속에는 벚꽃이 없다.

그러나 보라, 봄이 되면

얼마나 많은

벚꽃들이 피어나는가. "

왕과 궁녀 사이에 태어난 사생아로 왕비의 질투에 의해서 쫓겨난 이큐는 한 때 절박한 가난함으로 향을 팔아 간신히 연명하다가 20세에 이르러 승려가 된다. 27세 때 까마귀의 울음소리를 듣고 깨달음을 얻었던 이큐는 어느 봄날 황홀하게 피어난 벚꽃을 보고 그 유명한 선시를 노래한 것이다.

이큐의 선시대로 가지를 부러뜨려 보고 꺾어 봐도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빈가지였던 헐벗은 나무는 오늘 갑자기 저렇게도 많은 꽃들을 피워올리고 있는 것이다.

그 어디에도 없던 꽃들은 갑자기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그리하여 내일이면 승려의 말대로 꽃들은 모두 져버려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이렇듯 꽃들은 어디로부터 와서 잠시 피었다가 어디로 사라져버리는 것일까. 잠시 생각하는 동안 차는 멈춰 섰다. 작은 자갈밭으로 이루어진 마당 옆 건물에는 다음과 같은 팻말이 붙어 있었다.

'광정원(光淨院)'

잠시 절을 방문하거나 사정이 있어 절에 머무르는 손님을 맞이하는 건물인 듯한 느낌을 주는 객전(客殿)이었다.

글=최인호

그림=이우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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