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 포럼] 오늘의 운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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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구본무(具本茂) LG그룹 회장은 요즘 하루에도 몇번씩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을지 모른다. 하이닉스 반도체(옛 현대전자)의 벼랑 끝 운명을 보며.

LG의 반도체 사업을 현대그룹으로 넘기라는 이른바 '빅딜' 압박을 받던 具회장은 1999년 1월6일 오후 청와대로 들어가 김대중(金大中)대통령에게 '빅딜' 에 응하겠다고 밝혔다. 그날 밤 자정 무렵 만취해서 귀가하던 具회장은 중앙일보 기자에게 "모든 것을 다 버렸다. 지금 심정으론 할 말이 없다" 고 말했다.

*** 남북 집착이 '林禍' 불러

화(禍)가 곧 복(福)이고, 복이 곧 화라 함은 이런 것이다.

세계 반도체산업은 지금 공급과잉으로 몸살을 앓으며 어느 나라 어느 기업이 먼저 넘어가느냐는 절박한 생존게임에 몰려있다. 11조원의 빚에 짓눌린 하이닉스반도체가 만일 지금 LG 계열사라면 그룹 전체가 흔들렸을 것이다.

험한 세상, 한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운 세상에서 화가 복이 되고 복이 화가 된다는 것만큼 우리에게 항상 마음가짐을 바르게 하라 이르는 이치가 또 있을까. 어제 임동원(林東源) 통일부 장관 해임안 가결로 DJP 공조가 깨진 '국민의 정부' 도 집권 이후 지금까지 화복이 뒤바뀌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97년 환란은 분명 큰 화였지만 동시에 우리 경제를 위해서는 큰 복이 될 수도 있었다. 이른바 '준비된 대통령' 과 함께 온 나라가 혹독한 구조조정을 별 군소리 없이 받아들였던 것은 환란 덕이었기 때문이다(실상 그 구조조정은 '준비된 개혁' 이 아니라 국제통화기금 등으로부터 선택의 여지도 별로 없이 졸지에 '받아든 숙제' 였고 '빅딜' 같은 것은 숙제 과목에 들어있지도 않았지만).

그러나 그 복은 99년 말 金대통령이 "경제위기는 극복됐다" 고 선언하면서 깨지고 만다. 경제 복도 정권 복도.

돌이켜 보면 그때까지의 복이 한쪽으론 金대통령의 화를 잉태하고 있었을지 모른다. '준비된 개혁' 을 취임 직후 바로 시작해도 집권 5년은 충분치 않은 기간인데 환란 극복에 하루 하루 시간을 까먹고 있다는 초조함 때문에.

서둘러 위기극복을 선언한 金대통령은 이후 '준비된 개혁' 들을 차례 차례 실행에 옮겼고 이 또한 화.복을 동시에 불렀다.

지난해 의료대란만한 화가 어디 있었겠으며, 남북 정상회담과 노벨상 수상만한 복이 또 있었겠는가. 나라의 입장에서도 정권의 입장에서도. 하지만 이제 경제는 어렵고 다름 아닌 남북문제 때문에 공동정권은 위기를 맞았다.

경제 복도 정권 복도 다 깨진 것 같지만 이 또한 이제부터라도 하기에 달렸다.

林장관 해임안 가결이 햇볕 정책을 전면 부정하는 것이라고, 과거의 적대적인 남북관계로 돌아가자는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다만 대북 포용정책의 과정.방법.속도에 문제가 있다는 것일 뿐이다.

달리 보면 역대 대통령 가운데 남북 정상회담을 실현한 최초의 대통령으로 역사에 남을 복이 돌아간 金대통령에게 "그 복을 혼자의 공으로 독식(獨食)하려 하거나 당대에 모든 것을 다 이루려는 의욕은 화를 부를지 모른다" 는 역사의 제동일 수도 있다.

만일 김일성 주석이 갑자기 사망하지 않아 일찍이 94년에 YS가 대동강변에서 조깅을 할 수 있었다면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 정.경 모두 전화위복 돼야

경제도 하기 나름이긴 마찬가지다.

99년 말 이후 국정 우선순위에서 밀려났던 경제를 지금부터라도 다시 국정의 중심에 돌려놓아야 한다. 경제가 나쁜 지금이 다시 한번 주어진 기회다.

남북문제나 경제는 다 같이 국가 백년대계다. 백년 화복을 우리가 어찌 미리 알 수 있으리오만은 마음가짐에 따라 얼마든지 화를 복으로 돌릴 수는 있다. 林장관 해임안 가결도 그런 뜻에서 백년대계를 위한 복이 될 수 있고, 어려운 경제도 그냥 화가 아닐 수 있다.

김수길 경제담당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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