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시평] 이념 중립적인 개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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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현 정부의 임기가 기울어가며 그간의 개혁정책을 둘러싼 설익은 이념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방법엔 문제가 있을지언정 목적에는 큰 흠이 없어보이는 복지정책 몇개를 놓고 사회주의라 정의하는 코미디까지 등장한다. 이젠 개혁이란 말을 던지기 전에 내가 어느 편에 서 있나를 점검해야 할 정도가 됐다.

*** 정책표류 주된 이유 뭘까

우리가 개혁을 원하는 것은 현상에 만족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람에 따라 불만의 내용이 다를 수 있다. 예컨대 정부의 복지지출이 지나치다고 보는 사람이 있는 반면,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정책이나 제도를 바꿔야 한다는 사람도 있다.

결국 대다수 사람이 변화를 원한다 하더라도 변화의 방향과 내용이 일치하지 않는다면 선택이 불가피해진다. 민주사회에서는 이러한 선택이 정치과정을 통해 이뤄진다.

정책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 지는 것이다. 정책의 내용은 전문가들에 의해 외생적으로 결정될지 모르지만, 정책의 채택과 집행은 시민 개개인의 선호를 결집하는 정치과정의 내생적 산물이다.

개혁이 어려운 것은 변화에 필요한 정책의 내용을 몰라서가 아니라 이러한 변화가 궁극적으로 가져다 줄 혜택을 시민 다수에게 설득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정책결정자는 현실정치에서 수용되기 힘든 최선의 대안보다는 실현가능한 대안 중에서 가장 나은 선택을 하는 차선의 해법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변화를 갈망하는 대중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상당수의 개혁정책이 표류하게 된 주된 이유는 정책을 만드는 머리와 이를 집행하는 힘이 분리됐다는 것이다.

변화가 초래하는 바람직한 결과의 홍보에는 열을 올리면서 변화로 인해 손실을 보는 계층의 반발과 정책을 집행하는 관료집단의 이해관계는 과소평가했던 것이다. 개혁의 담론들은 무성했지만 우리의 현실에 부합하고 일반인들도 나름대로의 입장을 취할 수 있을 정도의 구체화된 정책비전은 찾기 힘들었다.

이념은 말로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정책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다른 나라에서 생성된 이념의 짜깁기로 이뤄진 정책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혜택과 비용을 투명하게 점칠 수 있는, 실천 가능한 정책을 제시하는 과정에서 사회에 대한 가치관과 정부와 시장의 경계선이 구체화되는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가 필요로 하는 것은 고답적인 이론이나 정치구호의 하향주입이 아니라 다수의 유권자를 납득시킬 수 있는 대안의 생성이다. 민주사회가 성숙해 중간계층의 목소리가 커질수록, 경제통합과 함께 국제경쟁이 치열해 질수록, 이데올로기에 의해 구분되는 경제정책의 차이가 크지 않을 수 있다.

시장원리를 작동시키기 위해 제도나 법질서, 투명한 거래관행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입장이나 기존의 부족한 제도나 관행의 기반 아래서 시장원리를 무리하게 확산시키는 것은 위험하다고 보는 측이나 구체적인 정책의 수준에서는 공유하는 바가 크다.

개혁의 이유를 시장의 실패에 있다고 보건, 정부의 실패에 있다고 보건 간에 우리 사회가 필요로 하는 제도개혁의 방향에 대해서는 상당부분 공감대가 형성돼 있다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어떤 이데올로기 집단이 집권을 하느냐가 아니라 누가 보다 설득력 있는 정책비전과 집행 가능성 있는 개혁프로그램을 내놓느냐다.

*** 설득력있는 비전이 중요

민주화된 정치과정의 현실적 영향을 고려해 정책을 수립하고, 시장개혁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사회갈등을 해소할 대안을 생각하는 일은 이념과 무관하게 진행될 수 있다.

역설적이지만 현 정부는 이념다운 이념은 내세워보지도 못한 채 몇몇 정책실패의 후유증에 시달리다 이념논쟁의 회오리에 휘말린 셈이다. 야당도 공격만 할 것이 아니라 역지사지의 관점에서 자신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국민은 싸움꾼들의 말장난보다 진보와 보수의 개혁정책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다른지를 듣고 싶은 것이다.

여러 분야에서 제도적 성숙이 시급한 우리의 상황에서는 이념과는 독립적으로 개혁을 추진할 여지가 크다. 같은 문제를 다른 색깔로 포장해 다투는 것은 어리석다. 지금은 묵묵히 앉아 해답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기를 펴야 할 때다.

전주성 이화여대 교수 · 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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