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을 열며] 벗어야 할 '북한 효과'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한국의 러시아 전문가들 사이엔 '북한 효과' 라는 말이 있다. 평소엔 러시아에 대해 무관심으로 일관하다 북한과 러시아간에 어떤 관계개선이나 교류의 움직임이 생기면 벌떼처럼 일어나 너도나도 호떡집에 불난 것처럼 떠들어 대는 현상을 일컫는 말이다.

*** 대러 정책 좌지우지

김정일(金正日)북한 국방위원장의 이번 러시아 방문을 전후한 현상도 마찬가지다. 벌써부터 서울에선 북한이 러시아와 급속 밀착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한.러 정상 등 고위급 회담이 열려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이런 경향은 자칫 잘못하다가는 한국의 대(對)러 정책과 러시아의 대한(對韓)정책이 북한이라는 변수에만 집착한다는 이미지를 확산시킬 우려가 있다.

러시아는 한반도 주변 열강 중 하나다. 또 북한에 대한 역사적, 정치.경제적 영향력을 확보하고 있는 몇 안되는 국가 중 하나다. 따라서 이런 러시아를 대북정책의 주요한 틀의 하나로 사용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다.

하지만 대러 정책이 너무 대북 정책의 틀에 사로잡히다 보니 양국관계의 복합적이고 포괄적인 발전에 장애가 되는 것도 부정할 수 없다. 수교 10주년이 됐지만 양국은 아직도 장기적이고 포괄적인 발전의 기틀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

한국은 여전히 러시아를 홀대하다간 몽니를 부릴 경우 대책이 없다는 인식에 기초한 대증요법적 외교로 일관하고 있다.

이 때문에 러시아에서는 한국이 러시아를 너무 북한과 연관해 다루는 점을 못마땅해 하는 시각이 많다. 한국의 전문가들 사이에도 한국의 대러 정책이 장기적이고 복합적인 방식이 아닌 대증요법적 방식으로 진행돼서는 안된다는 우려들이 있다. 그러나 한.러 관계는 이런 대북한 정책의 틀 속에서만 갇힐 정도로 가능성이나 폭이 좁지 않다.

극동 연해주 지역엔 요즘 혁명적 변화가 진행 중이다.

러시아 인구가 감소하면서 넘쳐나는 중국인들의 월경(越境)과 한국인들의 진출에 따른 새로운 기류가 형성되고 있다.

러시아는 장기적 차원에서 이 지역에 대한 특정국가의 영향력 증대를 막고 낙후된 극동 러시아 지역의 발전을 도모하기 위한 구상을 만들고 있다.

중국.북한.한국.일본이 만성적인 에너지 부족국가임을 감안해 이들에게 사할린, 이르쿠츠크, 중부 시베리아 지역의 자원과 에너지공급을 통해 하나의 에너지 공동체화하려는 움직임도 그중 하나다. 시베리아 횡단철도(TSR).한반도 종단철도(TKR)연결 프로젝트도 이런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도출된 것이다.

일본과 중국 심지어 몽골까지도 이런 러시아의 움직임에 민감하다. 하지만 한국은 아직도 러시아를 한번 들어가면 빠져나올 수 없는 블랙홀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다.

장기적 차원의 정책은 찾아보기 어렵고 경협차관 등 대러시아 정책을 다루는 담당자들도 1~2년만 지나면 담당업무가 바뀌는 실정이다. 또 워낙 내용이 복잡하다 보니 자기가 담당하는 기간에 새로운 일을 벌이기보다는 문제를 야기하지 않겠다는 면피용 생각을 갖기 일쑤다.

*** 대증요법 외교는 안돼

하지만 조금만 더 긴 호흡을 갖고 이 지역을 세밀히 살펴본다면 한국은 프랑스가 유럽연합(EU)탄생에 결정적 역할을 한 것처럼 동북아 지역에서 새롭게 형성될 하나의 경제.생활.물류 공동체의 주역이 될 수 있다.

또 이는 중국의 추격과 일본의 견제 속에서 진퇴유곡의 형국에 처해 있는 한국에 활로가 될 수도 있다.

한국은 새로운 도전을 맞고 있다. 지금이라도 대러 정책을 대북한정책의 테두리를 벗어나 비전을 갖고 종합적이고 복합적으로 추진해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한.러 양국관계의 진정한 발전은 불가능하며 한국이 동북아에 형성되고 있는 신시대에 주역이 될 수 있는 기회도 좀처럼 오지 않을 것이다.

김석환 <국제부장>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