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해신 - 제1부 질풍노도 (2)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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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제 1장 붉은 갑옷

1572년의 전투에서 패배 당하였던 오다와 도쿠가와의 연합군들은 3년 동안 군사를 정비하여 반격 시기만을 노려오고 있었으며 특히 '가이의 호랑이' 다케다 신겐이 죽어버렸다는 소문이 사실로 확인되자 쾌재를 부르고 진군하였던 것이었다.

그리하여 오다와 도쿠가와의 연합군들이 진군한 곳은 도쿠가와의 근거지였던 미가와(三河)의 나가시노(長篠), 바로 이 나가시노에서 천하쟁패의 대회전이 벌어지게 되었던 것이었다.

더 이상 아버지의 죽음을 비밀로 숨겨둘 수 없었던 가쓰요리는 혜림사에서 가족들과 전 가신들이 운집한 가운데 아버지의 장례식을 2년 만에 성대하게 치렀다. 장례식을 치르고 나서 가쓰요리와 군신들은 혜림사의 경내에 함께 모시고 있는 조신(祖神)에게 제례를 올렸다.

혜림사는 대대로 다케다 가문의 장례나 무운장구를 비는 신전이기도 하였다. 때문에 부처와 더불어 조신을 함께 모시고 있는 곳이었으므로 조상신을 모시는 사당이 함께 나란히 마련되어 있는데 이 사당에는 다케다 가문의 시조라고 할 수 있는 신라사부로(新羅三郞)의 신상이 안치되어 있었던 것이었다.

신라사부로.

신라사부로의 원 이름은 미나모토 요시미쓰(源義光). 바로 이 요시미쓰가 다케다 가문의 뿌리이자 조상신이었던 것이었다. 그러니까 신라사부로는 다케다 가문의 제1대 조신이며, 아버지 다케다 신겐은 19대, 자신은 20대 후손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신라(新羅). 이 이름은 우리나라 역사에 나오는 고대 국가의 이름이 아닐 것인가. 우리나라에서 고구려.백제와 더불어 삼국시대를 열었던 신라 그리고 마침내 삼국을 통일하였던 국가 이름이 어째서 다케다 가문의 조상신의 성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것일까. 미나모토 요시미쓰, 1045년에 태어나 1127년 10월 20일에 죽은 평안(平安)후기의 무장.

다케다 신겐보다 5백년 전에 태어난 요시미쓰는 어째서 자신의 성을 미나모토(源)에서 신라(新羅)로 바꾸었던 것일까. 신라의 성은 그의 손자인 기요미쓰(淸光)에 의해서 다케다로 바뀌어 사라져 버렸지만 어쨌든 신라사부로는 다케다 가문에 씨신(氏神)인 것이다.

성대한 장례식을 마치고 조신인 신라사부로 신상 앞에서 무운장구를 빈 가쓰요리는 사당에 봉안돼 있는 '어기순무(御旗盾無)' 를 꺼내들었다.

'어기순무' 는 대대로 이어져 내려오는 다케다 가문의 가보였다. 다케다 가문의 조상인 신라사부로로부터 전해져 내려오던 깃발과 갑옷인데 이는 전설적이었던 무사 신라사부로가 전쟁터에서 들고 다니던 깃발이었고 또한 신라사부로가 전쟁터에서 직접 입었던 갑옷이었다.

이 깃발과 갑옷은 다케다 가문의 가보로서 '미하타다테나시' 라고 불리던 보물이었다. 그 깃발은 '풍림화산(風林火山)' 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고 있었는데 특히 무적이었던 다케다군의 기마군단들이 들고 다니던 깃발이었다.

그 당시 다케다의 기마군단은 한번도 패한 적이 없었던 백전백승의 천하무적이었다. 이들은 전쟁터에 나갈 때마다 사당에 봉안돼 있던 다케다의 씨신 신라사부로가 직접 들고 다니던 깃발을 앞세우고 질풍처럼 돌격하고, 때로는 숲처럼 서서히 침입하고, 때로는 불처럼 활활 타올라 약탈하고, 때로는 산처럼 꼼짝 않고 버티어 가는 곳마다 승리하였으므로 적들은 이 깃발만 봐도 도망쳐버리기 일쑤였던 것이었다.

이 어기(御旗)가 '풍림화산' 이라는 대명사로 불리게 된 것은 이 깃발에 쓰여 있는 14자의 글자 때문인데 그 글자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신속함은 바람과 같이 하고, 더딘 움직임은 숲 속과 같이 하여 침략하고, 빼앗는 행동은 불길과 같이 하고, 움직이지 않을 때는 산과 같이 하라. (疾如風徐如林侵 掠如火不動如山)"

소설 최인호

그림 : 이우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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