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황장엽 방미에 신경과민 아닌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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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황장엽(黃長燁)전 북한 노동당 비서의 미국방문 문제를 둘러싼 논의가 기묘하게 꼬여가고 있다. 정부와 친여세력, 야당과 보수세력이 대체로 각기 반대와 찬성 의견으로 엇갈린 가운데 黃씨 본인은 그제 '최근의 비판글에 대한 우리의 입장' 이란 성명을 발표, 방미에 강한 애착을 표시했다.

이 논란이 장기화할수록 우리 사회에 갈등의 골만 깊게 할 뿐만 아니라 우리 정부에 대한 미국의 인식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여 정부가 대범한 결단을 할 시점에 왔다고 본다.

우리는 미국 하원 의원 세명이 그의 방미를 초청했을 때 본인 의사를 존중하는 쪽이 낫다고 이미 밝힌 바 있다. 정부는 그의 특수한 신분을 감안, 미국 정부가 신변안전을 보장하고 미국 의회의 공식초청이 온다면 그를 보내겠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제임스 켈리 국무부 동아태담당 차관보가 최근 黃씨에 대한 미국 정부의 신변안전 보장을 다짐했고, 헨리 하이드 하원 국제관계위원장의 초청장이 온 이상 정부가 그의 방미를 더 이상 저지할 명분은 없다는 것이 우리의 판단이다.

물론 정부가 그의 방미를 탐탁지 않게 보는 배경을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다. 북.미간의 경색된 관계가 남북한 관계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시점에 黃씨가 미국 의회 등에서 북한의 실상을 여과없이 털어놓을 경우 야기될지 모를 역효과를 정부가 고심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그렇다고 그를 당장 미국에 보낼 수 없다는 정부의 입장이 정당성을 갖는 것은 아니다. "국익을 위해서는 개인의 인권을 희생시켜야 한다는 것은 독재의 논리가 아닌가" 라는 黃씨의 말은 그렇다 치더라도 정부가 앞으로 일어날 '나쁜 상황' 을 예단해 자유민주주의의 기본권인 거주.이전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를 제한해서는 안될 것이다. 또 남북문제에 관한 한.미공조와 정보교류라는 원칙적 입장에서도 그의 방미를 막을 이유가 없다.

우리가 그의 방미를 둘러싼 논쟁에서 정작 우려하는 바는 우리 사회의 편벽된 이분법이 예외없이 이 논란에도 투영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의 방미를 허용해야 한다는 측은 사대주의자.반통일분자로, 반대하는 측은 친북.진보세력으로 몰리는 듯한 것이 우리 사회의 경향성이다. 이런 흐름이 예각화하는 것은 국가발전이나 남북관계의 건전한 발전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저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할 것이다.

따라서 정부는 사회의 이같은 소모적 논쟁에 종지부를 찍기 위해서라도 그의 방미문제를 조기에 매듭짓는 현명한 조처를 취해야 한다.

이런 거북한 논란이 국내는 물론 미국 조야에서 지속된다면 우리의 대외 이미지가 실추될 것이고, 북한을 놓고 정책공조를 강화해야 할 미국과의 협조에 균열을 초래할 가능성도 없지 않다. 정부는 남북관계에서 '황장엽 변수' 를 지나치게 고려하지 말기를 당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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