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커밍스의 쓴웃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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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올해 쉰여덟살 난 브루스 커밍스는 국내에도 잘 알려진 미국인 정치학자다. 1981년 출간된 저서 『한국전쟁의 기원』(제1권)은 우리 학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

80년대 운동권, 그 중에서도 주사파(主思派)들은 이 책을 특히 반겼다고 한다. 한반도 분단의 책임을 옛소련보다 미국에 더 많이 지우고, 한국전쟁을 혁명적 세력(북한)과 수구집단(남한)간 내전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커밍스는 한국전쟁을 6.25 이전에 잦았던 남북한간 국경충돌의 연장선상에서 파악했다.

이른바 수정주의적 시각이다. 물론 90년대 들어 그의 주장은 상당부분 빛이 바랬다. 얼마 전 출간된 한림대 전상인(全相仁)교수의 저서 『고개숙인 수정주의』는 "커밍스의 수정주의 앞에서 국내 학계와 지성계는 적과 동지로 구별되기 시작했다" 고 아프게 지적하고 있다. 학계의 한 축은 '커밍스 콤플렉스' 가, 다른 한 축은 '커밍스 알레르기' 가 지배했다고 그는 진단한다.

언론계도 예외가 아니었다. 全교수의 저서에 따르면 "매년 6월 25일자 한국의 주요일간지 사설은 커밍스를 북침론자로 속단하고 위험인물로 치부하곤 했다. 언론의 이러한 치기 어린 행태는 지금도 남아 있다" 는 것이다.

"예컨대 스스로 진보를 표방하는 '한겨레' 는 아마도 커밍스를 오랫동안 '동지' 로 생각해 왔던 모양이다. 커밍스가 최근 저서에서 '조선처녀들을 일본군 위안부로 끌어가는데 조선인들이 큰 몫을 했다' 고 주장하자 '커밍스가 이상한 주장을 했다' 고 썼다. 말하자면 사랑하던 연인이 변심을 했다는 식이다. "

" '한겨레' 와 대척점에 서 있다고 볼 수 있는 '조선일보' 엔 커밍스는 자연히 '적' 이었을 것이다. 똑같은 책에서 커밍스가 한국전쟁에 대한 김일성의 책임문제를 거론하자 '커밍스가 수정주의 학설을 폐기처분했다' 고 단정한 것에 이어서 한국전쟁에 관한 오랜 논쟁이 '깔끔하게 마무리' 됐다고 선언했다. "

커밍스가 알았다면 쓴웃음을 지었을까, 아니면 홍소(哄笑)라도 했을까. 따지고 보면 다른 신문들도 별반 차이날 게 없다. 소위 '언론개혁' 이라며 속셈 뻔한 주장들을 미사여구로 포장해 늘어놓는 것보다 이런 '치기' 부터 최소화하려는 노력이 더 급하다고 본다. '누구나 자기 시야의 한계를 세계의 한계로 간주한다' 는 경구(警句)가 있다. 비단 언론계에만 해당되는 말은 아니다.

노재현 정치부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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