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계 빚 23% 늘었는데… 소득은 9% 증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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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우리나라 가계 부채의 문제는 소득보다 빚이 훨씬 빠르게 증가한다는 점이다. 또 높은 이자율 때문에 이자 부담이 커져 빚을 내 이자를 갚는 악순환에 빠져들 경우 경기 부양책이 먹혀들지 않는 등 장기 불황의 씨앗이 될 수 있다.

특히 기업 구조조정의 여파로 금융기관들이 기업 대출을 줄이면서 가계 대출을 늘리고 있어 가계 대출의 부실화가 금융기관 부실로 이어질 가능성도 작지 않다.

전문가들은 우리나라의 가계 부채 문제는 미국식 '과소비형 파산' 보다 일본처럼 '불황형 파산' 의 모습을 보이면서 장기 불황을 불러올 수도 있다고 경고한다.

◇ 소득은 제자리, 빚은 뜀박질=올 1분기 가구당 평균 빚은 1천9백30만원으로 1년 전보다 23.7% 늘어났다. 반면 도시 근로자 가구의 월평균 소득은 2백58만원으로 9.7% 증가에 그쳤다.

문제는 경기 침체에도 불구하고 가계 부채가 앞으로도 계속 불어날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외환위기 이후 금융기관들은 떼일 위험이 큰 기업 대출 대신 가계 대출에 주력하고 있다. 그 결과 가계 부채가 1998년부터 지난해 말까지 22.1% 늘어난 데 비해 기업 부채는 10.3% 증가에 머물렀다. 올 상반기에는 9개 시중은행의 기업 대출이 1조3천억원 줄어든 반면 가계 대출은 13조4천억원 증가했다.

◇ 높은 이자 부담이 문제=개인의 소득 대비 부채 비율은 99년 말 현재 73%로 미국(97%.98년 기준, 이자를 내지 않는 소비자 신용 포함).일본(93%)보다 낮다.

그럼에도 소득 대비 이자 부담률이 세배 이상 되는 것은 미국과 일본보다 이자율이 높기 때문이라고 한국은행은 분석했다. 특히 지난해 말 기준으로 개인들이 은행에서 빌린 돈(1백17조원)보다 이자율이 높은 신용카드.여신 전문기관.사채업자 등에게 빌린 돈(1백50조원)이 더 많아 이자 부담이 크다는 것이다.

◇ 소비.투자 침체로 이어질 수도=소득이 그다지 늘지 않은 상황에서 빚이 많아지면 가계의 소비 둔화→기업의 투자 부진→장기 불황으로 이어질 수 있다.

금융연구원 박종규 연구위원은 "미국의 경기 회복이 더딜 것으로 보는 근거가 가계 저축률이 마이너스라는 점" 이라며 "우리도 가계 부채가 경제 성장률보다 크게 늘고 있어 경기 회복의 걸림돌로 작용할 수 있다" 고 지적했다.

가계 빚은 연체되면 금융기관의 부실로 이어진다. LG경제연구원이 가계 부문의 부실 정도를 측정하기 위해 가계의 원리금 부담 정도.채무 상환 능력.실업률 등을 분석해 만든 가계 부실지수를 보면 지난해 3분기 6.2였던 것이 4분기 6.5, 올 1분기엔 6.9로 높아졌다.

90년대 중반까지 3~4였던 가계 부실지수가 빚 증가와 경기 침체의 영향으로 급등했다. LG경제연구원은 올해 은행의 가계 대출 연체율이 지난해보다 0.54%포인트 높아진 3.6%를 기록할 것으로 예상했다.

◇ 20대 신용 불량자가 늘어난다=한국신용평가정보는 지난 3월 초 경제활동인구 아홉명 중 한명(11.3%)꼴인 2백64만여명이 신용 불량자로 97년 말(1백90만명)에 비해 38.4% 증가했다고 분석했다. 특히 20대 신용 불량자가 전체의 13%인 33만명이고, 10대도 2천4백여명이었다.

대부분 신용카드 대출 연체자들이며 20대 여성의 경우 의류업체 카드 연체자가 절반을 차지했다.

서강대 조윤제 교수는 "자산이 적은 젊은 세대의 부채 비율이 높기 때문에 가계 대출의 부실화 가능성이 더욱 크다" 고 지적했다. 젊은 세대가 빚에 허덕이면 중장기적으로 경제의 활력이 떨어질 수 있다.

◇ 개인 신용 관리와 파산 제도 개선해야=일부 금융기관은 개인 신용을 충분히 따지지 않은 채 높은 금리로 위험을 회피하려 든다. 가계 파산이 금융기관 부실로 이어지는 것을 막으려면 신용카드사 등 금융기관들이 지나친 경쟁을 삼가고 고객의 신용을 엄격히 심사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파산을 선고할 경우 사실상 정상적인 경제활동을 다시 하기 어렵게 돼 있는 현행 개인 파산 제도를 개선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영국.독일.프랑스 등에서 시행하는 소비자 워크아웃 제도를 도입, 채무자가 채권금융기관과 협의해 빚을 갚고 회생할 수 있는 계획을 세우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LG경제연구원 송태정 연구위원은 "가계 부실을 막으려면 금융기관부터 고객의 신용을 잘 관리하고, 개인 파산자에 대한 사전 교육과 함께 조금씩이라도 빚을 갚도록 해 재기하는 데 도움을 주어야 한다" 고 말했다.

정철근.최현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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